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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Apr 07. 2023

텔레비전을 비웠다. 소심하게

 

작은 집에서 가장 번잡스럽고 밀도가 높은 공간.

책상 위 텔레비전과 그 주변의 기기들과 올인원 오디오는 모든 미디어 생활을 담당했다.

 

거거익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전 집에서는 모니터냐고 종종 의심받던 작은 텔레비전도 소파와 참으로 가깝게 놓이는 통에 이렇게 화면이 크게 느껴지며 실감 나는 화질을 선보인다. 여기에 연결된 오락기만 세 가지. 텔레비전을 보며 팔다리를 휘두르기도 하고, 골을 넣고 세리머니까지 펼치며, 어퍼컷을 날리며 결투를 하고 포켓몬을 잡으러 뭘 던져가며 뛰어다닌다. 

 

 20평을 줄여 오는 이사에는 무엇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을 가져갈 수 있는가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텔레비전 역시 열외가 아니었다. 그다지 텔레비전을 많이 보지도 않고 또 많이 보는 것도 싫다. 이사를 핑계로 비우고 싶었다. 사실  텔레비전 책상이 놓인 이 구역만 비워 내면 작은 거실에 통째로 빈 벽을 하나 가질 수 있다. 빈벽과 빈 바닥이 주는 개운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바뀌고 전학을 하고 놀던 친구들이 사라질 아이가 코로나 시국에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텔레비전을 비우지 못했다.


 분명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놈의 텔레비전은 잔소리의 원흉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느라 할 일을 미루고, 오락을 하느라 정해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거만 보고, 딱 이 판만, 딱 10분만, 오늘 금요일인데 하며 아이는 졸라댔고 큰 소리가 나야 멈추는 것이 오랜 기간 반복됐다.


나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하고 파닥파닥 움직이는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다른 사람 쉬는 것도 보지 못하는 건가 걱정도 했다.

 단 이만큼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분 단위로 쪼개 스케줄을 관리하는 M. 그녀는 식구들이 텔레비전 앞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그 말에 웃는 내게 아는 엄마는 자기는 바빠 죽겠는데 어항 속에 구피들이 살랑살랑 놀면서 돌아다니고 새끼만 낳는 것이 얄미워서 몽땅 드림을 했다는 빵 터지는 이야기를 해준다. 설마 나도 그런 걸까.


코로나가 정점을 찍었다.

엔데믹이란 단어가 뉴스에 등장할 무렵 당연히 독감일 거라 생각한 아이의 검사 결과는 코로나였다. 아침을 차려주고 출근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켜 놓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숙제를 할 때도 텔레비전은 켜 있었고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풀어준 게임은 아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낮에 이렇게 봤으면 이제 귀가 웅웅거려서라도 끄고 싶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끄면 무섭다고 했고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환하게 웃으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격리기간 이 지나도 한번 맛본 텔레비전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3월 1일 아침 축구하러 나가는 것도 거부하고 텔레비전을 보던 아이에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내 화가 나 자신을 삼키고 내 화를 못 이겨 적정선을 넘기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비참한 순간이 또 있. 다시 만날 일도 없는 내 인생에 아무 의미 없는 이에게도 꾹 참고 가라앉히는 화를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이에게 퍼부을 때, 그리고 그 안에 스쳐 지나간 이들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밀려드는 자괴감만큼 심장이 아파오는 것이 또 있을까. 


 빼곡하게 연결된 전선들을 다 뽑는다. 간간히 먼지를 털어줬다고 생각했는데도 얼기설기 엉킨 전선들 위에 수북이 쌓인 먼지들을 보니 직전의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기기들을 분리하고 닦고 케이블을 정리하고 청소까지 마무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 아이는 의외로 의연하게 분리하고 있는 걸 구경했다. 


 지는 했는데.

 과감하게 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텔레비전은 거실 한쪽에 두었고 게임기들도 단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그저 정리만 해 두었다.  

 텔레비전을 비우긴 비웠는데, 소심하게  셈이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이는 텔레비전을 다시 연결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같이 나가 축구를 하고 있다. 마침 길어진 낮과  따듯해진 날씨가 참으로 고마웠고, 코로나를 이겨 낸 아이의 건강한 체력에 감사했다.

캄캄해질 때까지 놀다 저녁을 먹고 잠깐 이야기하고 숙제만 하기에도 시간은 짧다.

함께 앉아 영화 보던 그리운 시간은 가끔 주말에 극장에서 팝콘 들고 앉아 영화를 보는 이벤트로 대체한다.


텔레비전이 없다고 24시간 상냥한 엄마냐면 물론 아니고, 여전히 잔소리하고 화내고 반성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텔레비전발 잔소리라도 사라진 게 어디인가.

텔레비전을 치우면 엄청나게 넓고 훤해질 줄 알았던 벽면도 생각보다 큰 변화가 없다. 기기와 선들을 텔레비전 뒤로 잘 숨겨놓았던 덕에 텔레비전 자리 딱 하나만 비었을 뿐이다.


그러나 딱 텔레비전 크기만큼의 빈벽을 보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만든 고민과 걱정으로 마음먹지 못했던 것을 비워 낸 희열을 느낀다. 텔레비전과 오락기 따위 없어도 건강하고 재미있게 하루하루 잘만 보내고 있는 아이를 보며 역시 앞서하는 고민은 쓰잘데기 없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소심하게 비웠지만, 게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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