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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필 May 02. 2024

서른다섯, 커피에 빠지다
(feat.바샤 커피)

평생 커피라고는 한 방울도 안 마시던 서른다섯 남자의 이야기

나는 89년생, 올해 서른다섯이다.

그동안 커피를 단 한 번도 커피가 정말 마시고 싶어서 사 마셨던 적이 없다고 하면 믿겠는가?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삼십여 년 동안 나한테 커피 = 사치품이었다. 옛날 마인드라기보다는 그냥 맛도 없고 쓰디쓴 검은 물을 사서 마실 바엔 그 돈으로 빵 한 조각을 더 사 먹자는 그런 마인드였다.




늦은 밤까지 열어서 자주 갔었던 스타벅스. 커피 빼고 다 마셔본 것 같다.


내 나이 스무 살, 스타벅스의 본고장이자 미국 내 인구수당 커피숍이 많기로 유명한 시애틀에서 유학을 시작했더랬다. 커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갑갑한 도서관이 너무나 싫었던 나는 도서관 대용으로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한 블록마다 있는 커피숍에서 하루의 반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당시 돈 없는 유학생한테는 커피숍만큼 혜자스러운 곳이 없었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그 당시에만 해도 bottomless coffee라고 하여, 바닥이 없는.. 의역하자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커피 무한 리필 집이 많았다. 무한리필이건 나발이건 고등학교 내내 커피라고는 입에도 안 대던 내가 한두 살 더 먹었다고 커피가 갑자기 좋아질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히 한잔 시키고, 영원히 줄지 않는 (나한테는 bottomless가 맞긴 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잔을 대여섯 시간 동안 쳐다만 보며 대부분 남기고 오길 부지기수였다. 나한테 커피 한잔값 $3.5는 커피숍 이용료와 같았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커피숍에서 지내면 커피와 자연스레 친해질 법도 하다만, 도저히 그 쓰고 맹맹한 커피 맛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나에겐 커피를 좋아하기엔 또 다른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쥐꼬리 만한 방광이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는지, 뭐만 마셨다 하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나한테, 커피는 어디 나갔다 하면 무조건 피해야 할 음료 1위였다. 이뇨작용을 원활하게 한다는 커피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 몸에만 들어오면 원활을 넘어 발광을 해댔고, 커피 두 모금이면 매시간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이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는 그런.. 커피였다. 그런 나에게 더더욱 커피를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스물셋 한여름이었던 것 같다. 둘도 없이 친한 친구한테 삼겹살을 대가로 친한 후배의 연락처를 받았더랬다. 당시에 꽤나 맘에 들었는지 어느새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다. 약속날을 더욱 완벽하게 보내기 위해 극 J인 나는 같이 저녁을 먹을 식당부터, 디저트 그리고 해가 진후 걸을 코스까지 완벽하게 짜서 머릿속에 고스란히 입력해 놨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고, 압구정로데오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달콤한 디저트로 마무리를 하고 한강공원으로 가려는 찰나, 날이 더웠는지 소개팅 상대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하여 마시면서 가고 싶다고, 본인이 산다고, 고르라고 하여 엉겁결에 "저도 그럼 똑같은걸로요"라고 하고 말았다. 하필 시켜도 가장 큰 사이즈였던 것 같다. 그렇게 아아를 얻어마시고, 약간의 긴장을 했는지 커피를 마시고 있다는 것을 인지를 못한 채 갤러리아 백화점을 지나 한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도 더워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린 터라 시원한 맛에 생각 없이 들이키다 반쯤 비웠을 때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으니.. '아.. 커피지 이거..'. 그러나, 이미 그란데 사이즈 반이 혈액을 타고 온몸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트라우마가 덜컥 발동되며 방광이 살살 쪼여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열고 근처 한강공원 화장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근처는 자그마치 30분 이상 걸어야 나오는 잠원한강공원이었으니,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신호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겨드랑이는 겨터파크가 개장했으며, 옆에서 뭐라 하는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렇게 10분을 더 가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잠시만요"를 다급하게 외치고 바로 앞에 보이던 다리 밑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해결을 하고 다행히도 급수대가 근처에 있어서 나름(?) 깔끔하게 손까지 씻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소개팅 상대는 지금까지도 편한 친구로.. 남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커피는 쳐다도 보지도 않는 그런 시기를 몇 년은 보냈던 것 같다. 나한테 맞지도 않을뿐더러,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는 것을 왜 굳이 마시겠는가!


그렇게 십여 년이 흘러 어느새 서른둘이 되었고 그동안은 커피와 담을 쌓고 살며, 커피숍을 가더라도 non-coffee 종류의 음료를 주문하곤 했다. 그사이 나는 뉴욕-뉴저지를 오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조는 그저 한 마리의 일개미가 되었다. 그러다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빈속에 커피를 머그컵 한잔 가득 들이부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여, 나도 자연스럽게 아침부터 반강제(?)로 커피 향을 맡게 되었고, 많이는 아니지만 한 모금씩 식후에 가끔 마시곤 했다.

여전히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모르는 채..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고, 작년에 처남 결혼식에 참석차 싱가포르에 들르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미식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전에는 커피에 관심이 1도 없던 터라, 바샤 BACHA 커피가 뭔지, 그게 싱가포르의 유명한 커피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도 유명하다길래, 지인들 선물 겸, 와이프가 커피를 몇 팩사서 돌아왔다.

커피맛이라곤 1도 모르는 내가 커피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는 바샤 커피를 처음 드립커피로 마셔본 순간,

지금까지 그 맛을 모르고 살아온 나의 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싱가포르에서 공수해 온 1910 맛(?) 커피
커피의 향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전 처음 마셔보는 그런 향과 맛이었다. 첫 향은 꽃향과 같은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감싸고, 혀에 커피가 닿는 순간 고소하면서 산뜻한 커피의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는 커피의 쌉싸름함이 탁 치면서 넘어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샤는 원두 그대로의 향이 아닌 가향, 측 향을 입힌 원두를 갈아서 만드는 커피라는 것을 알았고, 내가 지금 어디에 발을 들였는지 자각을 했을 땐 이미 늦었던 터였다. 한번 맛을 본 후로, 드립커피에 빠져, 하리오 드리퍼 및 필터를 급히 공수하여 내려마시기 작했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Marocchissimo, Sweet Mexico, 1910, Milano Morning, 그리고 Seville Orange 이렇게 사 와서 마셔본 결과 나의 가장 최애는 단연코 Seville Orange라고 할 수 있겠다. 첫 향부터 치고 올라오는 달콤한 오렌지 향, 확 튀지 않는 은은한 쌉싸름함, 뒷맛에 남는 견과류 고소함까지 다 마셔버려서 없는 지금 계속 생각 나는 향이다.

싱가포르에서 공수해 온 몇 안 되는 Flavored Coffee들이 넉 달도 못 가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생 처음으로 커피가 없어서 불안해하다니!




그렇게 바샤 커피가 바닥을 보일 때쯤, 집 근처에 커피숍을 아내가 알아와서 들러보게 되었다. 이름하여, Roast'd Cofee. 포트리에 있으며 뉴욕으로 가기 위한 조지워싱턴 다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주말만 되면 뉴욕으로 건너가려는 차들로 인해 숨도 못 쉴 만큼의 정체가 일어나는 곳이어서, 카페를 들를 때마다 욕이 한 바가지씩 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그 교통체증을 감수하고도 가서 마실 만큼 너무나 맛있는 커피를 균일한 퀄리티로 내려준다. 특히 아이스라테, Half & Half는 원두의 고소함이 우유/크림을 뚫고 나오는 특징이 있으며 둘이 마시다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 집에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드립커피로 내려 마시고자 원두를 갈아서 집에서 마셔 봤는데, 여전히 그 특징은 살아있었다.


카페에서 아이스라테를 만들 때 쓰는 원두 : LEGENDER


바샤를 계기로 십여 년 전부터 발길을 끊었던 커피숍을 내 발로 가게 되면서 다른 커피들도 이것저것 마셔보는 것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장모님의 친구분이 운영하시는 카페에서 받아온 원두도 갈아 마셔 보고, 네스프레소를 이용하여 여러 원산지의 원두도 맛보고, 커피 맛있다는 카페 가서 한잔씩 사서 마셔보고, 점점 커피에 혀가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 향을 맡으며 드립커피를 내릴 때는 0.21초간은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다


싱가포르에서 공수해 온 바샤 커피를 다 비우고 다른 커피들을 드립으로 내려 마신 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주말 우연한 계기로 바샤 커피를 하나 선물 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내려 마셔 보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나에게 커피라는 신세계를 알려준 바샤가, 나를 커피의 세계로 인도한 그 향들이,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바샤를 딱 마시는 순간, 이제는 너무 변해버린 내 혀가, 가향 커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못 마실 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커피 고유의 향에 다른 향이 섞여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모든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했던가. 가끔씩 일반 커피가 질릴 때 마신다면 더없이 좋은 옵션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 순간 늘어난 커피 컬렉션


얼마 전부터 집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더욱 많아졌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려 Gooseneck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원두 향을 맡으며 오늘은 뭐 마시지라고 고민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나이를 먹는 것인가 하는 씁쓸하면서도 어른이 된 것만 같은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들곤 했다.




80도의 뜨거운 물과 원두가 처음 만났을 때 내뿜는 저 가스, 향이 너무 매력적이다


그렇게 커피를 모르던 스무 살의 나는, 십오 년이 흐른 지금, 서른다섯이 된 지금에야 여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남들과 카페를 가면, "아 저는 커피 안 마셔요"라고 할 필요가 없으며,  어느 도시에 여행을 가더라도 동네 커피 맛집은 꼭 들르게 되었고, 무엇보다 여유롭게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온 거실에 퍼지는 감미로운 커피 향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맛이 있달까.

물론, 커피를 마신 후 여전히 화장실은 자주 간다.



                                                                                                                                                            The end.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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