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줘요,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만

가장 완전한 1인 가구 가장 되기

by 성당

잠시 손을 빌리면 모든 것이 편하다.

독립하여 혼자 사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모두 것들에 해당하는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품을 참 많이 들여야 '그냥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높은 삶의 질은 보통 꿈도 꿀 수 없지만, 공부를 끝내고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처리한 다음에 물 한 잔 마시고 노동을 해야 '그냥 일상'이 유지된다.

일단 '고양이 손'일지라도, 잠시 조력자의 손을 빌리면 도움이 되는 것들은 무척 많다. 가장 작게는 소소한 집안일. 설거지나 청소기 돌리기 같은 일들이 해당한다. 크게는 전구 갈기, 화장실 청소, 세탁조 청소나 집안 곳곳 수리가 필요한 곳 돌보는 일들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일들은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막연하게 느껴져 일부러 미룰 때도 있다.

그다음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엄마가 한 번씩 올 때 만들어주는 엄마 미역국. 그것은 내가 용을 써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부탁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준 음식을 평생 먹지 못해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음식들을 한 번씩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삶과 그것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삶은 많이 다를 것이다.

마지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다. 도와줘요, 하려다가도 막상 누가 나를 도와줄지 잘 모르겠거나, 그러다가 '이것이 진짜 도움이 필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다. 그런 일들은 크게 두 가지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힘들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내 일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오늘의 고민은 후자다.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든 하루다. 정말 끔찍하게 우울하고 힘든 날이다. 당초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맞는지 모르겠고, 이 문제가 도움이 필요한 문제일까 하는 생각과 누구라도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애초에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 혼란 자체가 너무 고역이다.

누구한테라도 도움을 청한다면, 그때 내가 하는 말의 본질은 '살려달라'는 의미로 수렴하겠지만 나는 남들이 나를 살려주기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나를 살려주기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뛴다. 왜 나는 가끔 한 번씩만 응급할까? 다시 내일이 되면, 오늘 조용히 버티기를 잘했다고 생각할까? 오늘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온몸이 들썩인다. 나는 지금 예술을 하고 있지 않다.

갑자기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사고 없이 그냥 살다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해 볼 때, 오래 못 살겠구나 하는 생각. 이 생각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계속 가늠하던 논리적 결과이다. 밤에 잠드는 순간을 떠올려 보아도. 나는 정말 평화롭고 온전하게 잠에 든다. 그전까지는 말할 수도 없이 괴롭다. 셀 수도 없는, 약을 삼키고, 약이 위장에 닿는 순간부터 나는 천천히 걷기조차 할 수 없으니까 그전에 정말 자야겠다는 확신을 내리고. 아무리 많아도 약은 한 번에 삼킨다. 언제부터 많은 알약을 한 번에 삼킬 수 있게 되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혀에 닿아 쓴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가루약을 빨리 탈출하길 바랐다. 알약을 삼키는 재능이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그 어릴 때의 나도 내가 매일 밤 알약을 7알씩 삼켜야만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최소한 잠에는 들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 밤에만 알약 7알씩, 아침에 따로 몇 알을 먹고 오늘처럼 특별히 응급한 경우 손에 잡히는 대로 삼킨다. 몸이 의사와 무관하게 늘어지고, 입이 마르고, 기운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 허기짐 같은 생리 현상만 남는다. 나는 기력 없이 물을 마시고, 음식을 과도하게 먹고, 양치질을 하다가 쓰러진다. 정신을 위해서 육체가 희생하는 역할이다. 나는 알약을 먹을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할 내 간과 위장을 상상한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고 그저 살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로 까맣게 타버린 그것을. 지금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내 몸을 망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오래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잠자는 데, 아침에 일어나는 데 이렇게 몸을 상하게 하는 약을 많이 먹어야만 한다면. 최근에 처방받은 약 중 하나는 부작용이 '사망'이었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냥 먹었다. 다행히 그 부작용은 낮은 확률로 발생하고, 내 현재는 유지되고 죽음은 미루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하다가, 과제를 하다가, 힘들어서 필요시 약을 찾았다. 계속 '아프게' 느껴져서 추가로 얼마나 먹어도 되는지 구글창에 내가 복용하는 약과 그것의 하루 권장 복용량, 그리고 과다 복용 시 생기는 부작용에 대해 찾아보았다. (이 약에도 '사망' 부작용은 명시되어 있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생존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각, 어떻게든 간절하게 내가 필요시 약을 먹어야만 하는 고통을 현실감이라고 느끼는 건 비약일까? 원래 주치의 선생님이 '건강한 힘'이 있다고 말하는 상태의 나는 현실과 직접 닿아 있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이런 날의 감각, 내가 '아픔'이라고 통칭해서 쓰는 것은 쓰리기도 하고, 시리기도 하고, 심한 공복감을 느끼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원래 현실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이런 것일까? 원래, 이런 현실을 하루하루 견디면서 사는 것일까? 명상, 명상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매일 느낀다. 잠시 멈추었다가, 근래 들어 명상을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조금씩 정신이 신호를 보낼 때 충실하게 응했어야 했던 걸까? 그렇지만 나는 힘들었는걸. 피곤하고, 할 일이 많고. 할 일이 정말 정말 많고 바빴는데. 풍요롭지 못하게 타고난 것의 벌일까?

나는, 다시 내일이 되면 오늘 참고 조용히 버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지 궁금하다. 오늘보다 더 '아프고', 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될지도 궁금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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