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NALD Apr 30. 2019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에세이를 즐겨 읽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 걸까?' 라는 마음이 들면 에세이를 선택한다. 나와 같은 호기심이 생긴다면 에세이가 좋다. 


이번에 읽은 책은 한수희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라는 책이다. 요즘의 에세이는 읽으면서 공감하고, 글 어딘가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글이 대세인 것 같다. 작은 것 하나도 의미를 부여하고, 나와 주변에 깊은 관심을 두는 그런 이야기들.. 어쩌면 예전부터 우리 주변의 에세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대에 접어들어 더욱 빛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책에는 표지에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라고 쓰여있다.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일까? 마치 자신의 책을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오래오래 좋아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짬을 내어 밭으로 가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즐거운 취미생활이 아닌 부담스러운 고역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올 한 해는 농사를 쉬기로 남편과 도원결의했다.

취미랍시고, 마음의 짐이 됨에도 꾸역꾸역 하는 것들이 있다. 한순간 즐기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겹겹이 쌓이는 것들. 이런 블로그 같은 SNS도 그렇고, 운동도 마찬가지. 배우는 것도. 탁 털어버리는 '도원결의'가 멋있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멍청하게 앉아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고 있으면 새벽 호수 위의 안개처럼 불안감이 차오른다. 

불안감이 엄습하는 표현을 참 멋지게 해놓아서.. 앞으로 불안감이 차오를 때면 이 글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좋은 건 항상 괴로운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거야."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밟아왔던 길을 생각해보기. 얼마나 진흙탕이였을 것이며, 얼마나 센 비바람이 몰아쳤을 것인가.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음을 항상 되새기기.




지금 돌이켜보면 어른들은 음악이 아니라 그 음악이 거리에 울려퍼지던 시절의 추억을 듣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젊은 날들을. 그들이 잃어버린 그 많은 가능성과 행운과 인연들을.

마치 버튼을 누르듯 어느 노래가 귀를 파고들면 그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냄새도, 맛도 모두 마찬가지. 각각의 것들마다 각각의 추억이 있다. 그렇다고 '이 노래는 그 때야.' 라고 정확하게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추억, 잊지 않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노래와 냄새와 맛.. 그 외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들.




이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낮은 언덕을 올라야 한다. 언덕을 오르면서 '으흠, 오늘은 그것에 관해 생각했군' 하는 식으로 나름 산책의 결론도 내린다. 그 결론은 대부분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자. 추잡하다.'

지금 깨달은 것인데, 나는 내 스스로 산책을 나간 적이 없다. 나의 '외출'은 '목적지'가 있는 것이였다. 그러니 산책은 아니지. 아무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는 대부분 타인이나 사물, 할(하고 싶은)일에 대해 생각을 하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라... '나는 오늘 몇 시에 일어났다.'라던가.. '나의 하루는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것일까? 모르겠다. 궁금하다..




묽디묽은 헤이즐넛향 커피나 파르페가 나오고 테이블마다 저놔기가 한 대씩 놓여 있던 그런 카페

파르페는 뭐랄까.. 로망이랄까? 내 기억에는 어릴 때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볼 때마다 맛있게 생겼다. 상큼할 것 같고.. '파르페'라는 단어가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단어를 보자마자 먹고싶어서..




울타리가 없는 자유는 아이에게는 혼란일 뿐이라는 것을.

작가처럼 나도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로 인해 잘못 키워지면 어쩌지?', '좋은 것만 보여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 작가는 몇 년을 키우다보니 저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몇 년의 시행착오를 대신 겪어주셔서. 




아무튼 이 책에 좋은 기운이 조금이나마 배어 있다면 그것은 내 기운이 아니라 이 편집자들의 기운일 것이다.

편집자에게 감사를 보내는 책은 그닥 보지 못했는데, 보더라도 무미건조한 감사 뿐이였는데 편집자에 대한 작가의 감사가 조금은 특별한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겠지만 이런 특이한 것에 울컥)






매거진의 이전글 90년생이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