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와 통합이 바탕이 된 공동체주의의 실천과 노력
‘어쩌면 우리 인간은 땅만 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치열함도 당시에는 젊은 세대의 유행 같은 것이 되었었다. 그때 심취했던 사회주의 사상들도 인간이 땅만 보며 사는 단순한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두에게 의식의 흐름을 여는 문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사유를 거닐다가 도달하는 곳은 항상 단순함과 명료함에 대한 갈구가 된다. 인간이 땅만 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실적 삶에 충실한 것이지만 한번쯤 고개를 들어 하늘도 보고 멀리 있는 수평선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가 객관화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이해하려는 이해와 관용도 때론 필요하다. 그렇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에도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가져보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보면 이러한 ‘스스로의 노력’이라는 사유의 결과가 함께 나누어질 수 있는 것보다 지켜야할 자신의 몫들이 많아졌음도 알게 하였다.
그 시절에도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들이 고향에 내려오면 여럿이 학사주점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나와 친구들은 당시의 군사정부를 비난하였고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토론하며 젊은 인생의 사회적 책임에 꽤나 진지하게 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들과 다를 수 있었던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젊음의 여유가 풍성했던 시간들이기도 하였다. 당시 나는 친구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제주에서 남해안이 잘 보일 만큼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을 아니?” 제주가 육지로부터 한참 떨어져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외진 변방이란 생각을 갖고 성장했던 친구들은 예외 없이 “그럴 리가 있어? 아니야!”라는 대답을 이구동성으로 하였다. 그것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하여 그때의 친구들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살아온 우리 모두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방의 작은 섬으로 생각했던 나의 친구들처럼 우리는 동방의 작은 나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보잘 것 없이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내가 비로소 알게 되었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예외 없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의지하고 주변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느끼는 문제에만 골몰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개개인이 갖게 되는 ‘정도의 문제’이지만 나 역시 그 시절 대부분의 생각들이 현실문제에 국한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나의 인생 역시 그러한 셈이다.
내가 던진 질문의 결론은 이렇다. 제주와 남해안까지는 70km정도 떨어져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그리고 비가 온 후 날씨가 맑은 날 수평선이 선명해지면 연중 제주에서 남해의 산과 섬들이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한밤중에 어두운 한라산 중턱에 오르면 부산의 불빛도 수평선을 밝히는 날이 있다. 그리고 남해의 마지막 섬 보길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겨울날 한라산의 하얀 능선이 선명할 만큼 뚜렷이 보이는 날도 있다. 제주도가 선명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대마도 남쪽 봉우리 끝에 서면 수평선에 솟아 있는 제주도의 모습은 흡사 등대 같다. 제주도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의 부속 섬으로 존재하였지만 훨씬 가까이에 있던 대마도가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졌던 이유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일 것이었다. 삶의 전반에 걸친 보편적으로 인간이 갖는 인식의 범위는 비단 그 시절의 젊은 내 친구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정한 집단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알고자 하고 주어지는 현실의 경험만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나라의 정치행위가 갖는 목적성에 대한 인식 또한 동일한 것이다. 정치라는 것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통치의 수단으로만 인식되어진다면 정치는 다스리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선진민주국가 역시 그들의 정치지도자는 이러한 오래된 인식의 함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삶의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인간의 인식의 범위는 그러한 인간의 행동들이 비단 그 시절의 젊은 내 친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일정한 집단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정치는 권력을 수반한다. 이 나라에서는 단순한 친목회조차도 그 대표를 뽑아 회원의 권리를 대신하게 하는 것이 일반성을 갖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집단에 작용하는 작은 권력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 대표는 ‘위임된 권력’을 행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임된 권력의 행사’이다. ‘정치가 다스리는 기술적인 방법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든 의도했든 항상 권력을 동반하고 있음에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서 위임되었음을 재확인하며 제도화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문명에 있어 진화의 산물이고 지속가능한 목표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수만 년 전부터 인류문명은 집단권력이 태동하였다. 그리고 인류문명은 정치권력의 형태와 상관없이 발전하여 왔고 앞으로도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인류는 북방을 호령했던 스키타이 민족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국가와 왕조를 명멸하게 하였다. 그 중에는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제국, 몽골, 투르크, 중국 등과 같이 우리가 위대했다고 생각하는 그 시대의 패권제국도 있었다. 그리고 현대국가의 지도자들 중에는 대제국의 후예를 칭하며 세계패권을 꿈꾸는 이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포악했던 집단파괴본능은 화려했던 왕조와 대제국의 어두운 그림자 뒤에 항상 숨어 있다. 그리고 피로 뿌려진 대지위에 인류문명이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근세 인류에 이르러 제국주의가 저지른 비도덕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의 패권 역시 그나마 그러한 비판의 범주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패권주의적 역할에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 또한 인류의 발전 과정이라는 폭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국 또한 언젠가 이러한 패권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아야 하는 미래는 반드시 올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제도는 아직도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며 인류 공영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하는 숙제이다. 대한민국은 우리를 앞선 나라들의 선례를 따라 왔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뒤를 열심히 밟고 그들과 나란히 하고 있다. 서구선진국가들의 2-300년에 걸친 현대화의 길을 땅만 보며 숨 가쁘게 따라온 셈이다. 삼권분립, 국가행정, 민주주의, 외교통상, 주민자치, 경제제도, 기술혁신, 노동운동, 문화예술, 국가안보, 환경제도 등. 1945년 해방 이후 지난 세기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국민 모두는 때론 벅찬 감동을 느끼고 있다. 중·일·러·미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자국의 이해관계로 첨예한 국제관계와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선진국으로 당당히 도약한 대한민국은 기적을 만들었고 저개발국가 국민의 희망이 되었다.
세계를 휩쓴 펜데믹 상황은 세계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현재 당면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변화가 어떠한 변수가 될지 예상조차 가늠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자신의 정치제도에 대하여 과신했던 서구 선진국조차 당황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제도는 국민과 분리되어 있었으며 위임된 권력이 다스리는 권력이 남용되어 왔다는 사실과 이로 인한 국민과의 괴리로 정치적 행위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행위가 온전히 국민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존재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선거의 수단으로만 생각되고 있는 현실은 국민을 다루고 조정하는 선거기술만이 존재하는 정치시스템으로 전락해 버린 결과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국민 스스로의 풍요로움을 만들고 외교와 통상을 통해 인류공영과 함께하는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패권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현대인류는 이것이 가능할 수도 없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궤나 현재의 중국의 경우처럼 모든 나라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될 만큼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미 인류는 하나로 연결되고 있으며 궁극의 필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 유럽대륙의 EU는 국가연맹체로서의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새로운 가치와 실천적 목표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또 어떻게 기여하고 선도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이 한반도에서 앞서 살아 온 선조들이 이룬 역사적 성과에 감사해야 하고 스스로의 자긍심을 가질 만큼의 충분한 문화적 성과도 만들어야 한다. 수천 년을 이어온 생존의 역사와 민족의 문화적 심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선도적으로 구현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가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사회의 이러한 긍정적인 힘을 키워 나가야 한다. 이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지속가능한 목표를 우리국민이 먼저 실천하고 실현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함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정치의 특권적 영역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는 시대적 요구이고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페러다임이 재정립될 필요를 다시 요구하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발전은 이러한 정치적 구조의 새로운 변화에 순응하는 길이고 국민의 사회생활 자체가 정치와 연결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류 보편주의적 가치는 모든 인류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현대사의 화려한 성과가 여기서 정체되고 앞만 보며 달려온 역사가 행여 앞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의 공허함으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세계를 선도하여 이끌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