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공기는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리적 현상이 물이 흐르듯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기운은 양에서 음으로 흐르고 강함에서 약함으로 흐른다. 넘치는 것이 부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나 만물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정지된 상태다. 우주 만물이 움직임 안에 존재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균형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확고한 물리적 운동원리가 균형을 향해 있음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다.
태초의 우주는 정지된 상태였을까? 그러면 우주만물의 존재방식이 운동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물리적 운동성이 균형을 향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지된 상태는 ‘무’를 말하는 것이고 운동성은 ‘유’를 말하고 있다. 태초의 우주의 탄생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곧 운동성과 동시하고 있다. 운동성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에너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작용에 관여하여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
무와 유가 동시한다는 것은 존재의 운동성과 이러한 운동성이 균형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죽음은 탄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간의 죽음이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이 어떠한 모습이든 영속성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인간은 서로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정신적 교류를 나누는 행위가 그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자연이 요구하는 음성인 것이다.
무한하다는 말은 유한하다는 또 다른 역설이 된다. 무한은 수, 량, 공간, 시간 따위에 제한이나 한계가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수학에서는 집합의 원소를 다 헤아릴 수 없음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철학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의 내부 부분이 한계가 있음에 대하여 본질적인 시간이나 공간 그 자체를 이르는 말로 언급되기도 한다. 기원전 4세기 경 인도 수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들도 무한에 관심을 두었지만 이를 개념화하지는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끝이 없는 것으로 1에 수를 계속 더하면 아무리 큰 수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무한은 실재한다고 단순하게 결정지었다. 그리고는 개념 자체를 보여줄 수 없는 것처럼 무한은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 수는 무한개가 있다. 무한은 모두 똑같을까? 모든 무한은 논리적으로 같지 않다. 가산무한과 비가산무한의 개념은 이를 설명하고 있다. 무한집합은 자연수로 만들어진 집합과 같은 수를 가지면 가산집합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가산집합이 아닌 집합을 비가산집합이라 한다. 이 말의 실제 의미는 특정한 집합과 자연수로 만들어진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면 가산이라는 뜻이다. 인류는 많은 수학적 발견과 물리적 현상을 발견하며 이를 하나의 수학적 공식 안에 집어넣기도 하였으나 수학과 산수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한의 개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학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우주의 존재원리에 접근하게 되고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자연수로 만들어진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만을 무한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가르치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비가산집합의 형식인 무한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추어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무한과 유한이 동시하고 있다.
인간이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우주적 질서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무한의 존재로 유한을 동시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동시에 많은 책임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이 가족이란 혈연에 한정되어 존재하지만도 않으며 공동체를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교류를 해야 하는 책임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에 기반이 되는 것이 배려이다. 공기는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고 넘치는 것이 부족한 방향으로 흘러 균형을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은 인간의 심성도 부족한 곳을 바라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적 원리에 감히 도전하는 존재가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의 주관적 의식의 존재는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과 더불어 그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책임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이나 자선을 베푸는 마음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 역시 그렇다. 그러하지 못한 것이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자기만을 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그 탐욕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게 된다는 사실은 결국 죄가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스스로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러한 배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흔히 다른 사람이 다 그러하다는 극히 일반적인 변명의 경우다. 다른 사람이 다 그러하므로 자신이 손해를 볼 수 있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생각들이다. 특히 순서의 문제가 그러하다. 순서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특권은 이러한 순서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특권은 하나의 문화현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계급사회를 만들어 왔고 힘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관행이었다. 현대 사회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인간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모두가 동의한 사실이지만 그 실천은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순서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공정한 선발제도가 있음에도 자신의 자녀의 합격을 부탁하는 행위가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보다 먼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관계자에게 청탁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으로 인해 분명히 손해 보는 사람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는 경쟁사회의 양육강식이라는 당위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순서를 지킨다는 것은 공정의 시작이다. 사회가 공정하다는 것은 서로에게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해가 있더라도 먼저 이를 감수할 수 있어야 공동체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돈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제는 복잡한 흐름을 개념화하여 현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원동력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를 극대화한 제도로 진화하였고 거기에 합당한 행위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경제의 총량은 한정된 것이며 많이 갖는 자가 있으면 그 만큼 부족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가진 자는 소수이고 없는 자는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삶은 고뇌의 연속이다. 많이 갖은 자나 없는 자나 그 무게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없는 자의 궁핍함은 무기력을 만들고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괴로워한다. 그 삶의 무게를 누구나 달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다른 이의 도움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으로 태어나 이를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남을 헤아리며 산다는 것은 부족한 이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기우리는 마음가짐과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우리기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경험의 시간이 많을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그늘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은 없는 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어려운 시절을 스스로 이겨내었다고 생각하는 세대는 지금의 풍족한 상황에서 가난하다는 것이 개인의 무능으로만 치부한다.
이제 선진국에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남을 헤아릴 줄 하는 공동체문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센델은 공동체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공동체주의의 모호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우리의 전통적 공동체문화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마음씨도 중요한 것이지만 사회가 나아가는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나를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집단이기주의가 아닌 모두가 함께하는 바른 방향에 공감을 표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을 헤아리는 마음은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이고 개인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분명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삶이 끝나는 순간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종교든 철학이든 어떠한 수단으로 자신을 치장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남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선행을 베풀고 그 후에 느끼는 뿌듯함은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고 그 감동은 우주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물리적 힘의 원천이 완전한 균형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역설이 우리의 삶에 투영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우주를 품고 사는 인간이라는 소우주가 갖는 삶의 의미는 남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