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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Oct 29. 2021

아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아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아들을 생각하면 나는 죄스러움이 먼저 앞선다. 이제는 아들의 나이만큼 26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세상을 떠난 아내가 지금 살아 있었으면 다하였을 정성스런 살뜰함들이 부족하였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은 잘 성장해 주었다. 허무할 정도로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 아들은 나에게 많은 기쁨과 위로를 주었다. 아내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린 아들의 눈망울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아내의 착한 품성을 닮았는지 걱정 한번 끼치지 않고 성장해주었다. 청소년기에 보이는 이유 없는 반항도 없었고 남을 배려하고 베풀려는 심성으로 나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나는 엄마에 대한 아들의 절제된 감정에 고마움을 갖는다. 아들은 성장과정에서도 엄마의 대한 그리움으로 허상을 만들며 젊은 엄마의 사진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다. 명절 때마다 아들에 손을 잡고 아들의 외가를 찾은 지도 30여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엄마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아들이 지금까지 이어온 나에 대한 배려였다. 아들은 지금까지도 엄마의 부재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아들은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들과 나는 서로가 그러한 그리움에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아들은 나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나의 기억 속에서 나의 아버지와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논쟁을 자주 하였다. 보수적 사고가 강하셨던 아버지는 당시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대학생들의 폭력적 시위를 TV를 통해 보게 되면 부정적인 입장을 말씀하시곤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꽤나 논리적인 나의 모습은 아버지의 이러한 견해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고 지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한 나의 모습에 아버지는 화를 내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또한 이러한 나의 모습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갖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자신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조르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겪은 일이다. 당시에 나는 항상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갖고 싶으면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생각해내고 그 나이에 걸 맞는 논리를 갖고 있다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곤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들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논리적 합리성을 꽤나 갖추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아들과의 견해가 다른 사안에 대해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자세를 항상 견지하고 있다. 군대휴가 온 아들이 적은 월급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종목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나와 논쟁을 하시고는 화가 난 마음이 진정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너의 의견이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주장이 지나쳐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논쟁으로 감정이 서로가 격하게 되면 시간을 두고 차분히 다시 말하는 것도 방법이란 말씀했다.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남들과 논쟁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순간적인 승부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들과의 대화에서는 이러한 자세를 의식적으로 철저하게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길 경우에도 아들과 나의 대화처럼 이러한 모습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나는 사실 아들에게 남들처럼 욕심을 갖지 못했던 것들이 잘못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있다. 나의 책상에는 꽤나 많은 책들이 쌓여 있다.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아들은 책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욕구도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몰입도도 적었다. 세상의 모든 능력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그를 통한 집중의 정도가 자신의 실력을 만드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이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들어지는 지속적인 집중력에 의해 자기개발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사장되고 만다. 나는 아들이 뛰어난 운동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음악적인 재능도 충분하였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키워주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꾸준한 경제적 상황이 아니었다는 현실도 작용하였다.


 나는 무책임할 정도로 아들을 방치하기도 하였다.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자신의 용돈은 자신이 벌어 충당하였다. 치열한 이 사회의 교육환경에서 아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한 셈이다. 중 3시절 누구나 인문계 진학을 위해 고민하고 있던 시절에 나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작곡으로 대학을 가고 싶다면 어렵게 인문계에 진학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내신 성적이 낮을 것을 감안하여 오히려 한 가지에 자유롭게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유학한 친한 후배에게 부탁하여 작곡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후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어 실용음악을 하고 싶다는 아들의 선택에 동의하여 주었다. 그때 나는 연주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보다 음악적 소양이 갖추어지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앞으로 넓어지게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제 군대를 제대하면 아들은 27살이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한 셈이지만 아들에게는 빚을 진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좀 더 여유로울 수 있었다면 내가 아들에게 해왔던 모습과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가난한 현실이 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돈에 대한 현실적인 부담을 갖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아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며 현실적인 고민에 빠져있다. 미리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현실에 자신감 있게 부딪힐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미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것도 나의 무책임한 한 마디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조심스러워진다. 나의 27살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존재와 주어졌던 부유함으로 인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더 죄스럽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다. 현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항상 여유로운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조언하고 싶다. 땅만 보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 주변이 사람들로 채워지면 그 사람들로 인해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란 이야기도 반드시 해주고 싶다. 그리고 인간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상대를 먼저 인정하고 이해하는 방법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마음의 상처도 인간에 의해 받는 것이라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 주고받는 관계에 대하여 냉철함도 유지되어야 한다. 나는 어린 아들을 지켜보며 이러한 품성들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또한 이제는 이러한 소양에 대한 인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이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고 그렇다고 믿는다.


 조급하지 않았으면 한다. 젊음의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고 미래만을 위해 현실을 희생시킬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고 쾌락만을 쫓을 이유도 없다. 주어진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고 감사하려는 마음이 보다 중요하다. 현실에서의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자신의 시야를 넓게 가져갈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준다. 지나간 청소년기의 부족했던 공부를 이제는 서두를 이유도 없다. 사실 그 시기에 배운다는 것이 한정된 작은 것들이었기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시간을 두고 꾸준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하면 하루 1시간의 투자로 얻지 못할 것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라는 시간은 인생이 내게 주는 선물임은 분명하다. 현재에 충실한 삶이 모여 미래의 자신을 만드는 것이고 순간의 시간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선물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지만 나의 아들로 태어나준 것에 감사한다. 돌이켜 나는 아들을 나의 의지대로 키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고 싶었고 아들은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며 성장했다. 어딘가에서 내게 온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부모가 그러한 것처럼 아들을 사랑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책임이란 무게를 느꼈던 것도 현실이었다.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그림자가 항상 어린 아들에게 남아있었지만 어린 아들의 눈에서 빛나던 아내의 눈빛도 사라졌고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아들을 아내의 분신으로 생각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부질없음을 느끼게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것은 나의 아들이 하나의 인격 그 자체로 존재하고 스스로 성장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아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들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다. 삶에 성실했고 품격 있는 삶을 사셨던 나의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기억들처럼 그 만큼의 흔적을 아들에게 남겨줄 수 있다는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인생을 통해 느끼고 고뇌했던 삶의 흔적과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나의 아들이기에 나의 삶을 조금은 이해하려 하는 마음만은 가져줄 것이다. 나는 그것이면 족하다. 아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애써 증명하려 나의 대한 기억을 포장하고 대단한 무엇으로 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듯 나의 아들도 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 순간 한 아비가 되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어버린 글쓰기가 아들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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