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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Nov 08. 2021

학교와 학습에 대한 소회

생각하며 세상을 거닐다

학교와 학습에 대한 소회

 

 학교가 우리에게 주는 정서상의 교감은 따뜻함이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그렇다.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이러한 정서가 조금은 반감되기도 한다. 학교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는 이유는 친구들에 있다. 그 시절의 친구들도 나름의 사회를 구성하고 모든 종류의 우열이 존재하였지만 그것만이 기준이 되지 않는 순수함이 있었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치열한 사회생활 속에 친구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겪게 되는 어려움에서도 더욱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사실상 학교에서 소모되는 많은 시간에 비하여 배움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고 서열을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러한 따스한 정서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학교교육이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배움을 나누는 시간들이 되었다면 그 시간들을 통해 많은 배움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이러한 배움에 즐거움이 있었다. 다른 학교들과 다름없는 석차가 있었고 월말고사가 존재하였지만 일등을 누가 하였는지 자신이 몇 등을 하였는지 관심을 갖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당시 학교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 반영된 결과였고 선생님들 또한 1등을 한다고 특별히 그 친구를 부각시킨 기억도 없었다.  


 당시에 주 2회 특별활동을 장려하였는데 나름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따라 자유학습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작곡반과 운동부를 선택하였다. 당시를 회상하면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그 때 음악이론에 대한 기초지식이 다져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운동을 하며 나의 신체능력을 관리하는 방법들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나의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당시의 학교교육에 대한 만족스런 공감을 표현한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는 교육대학 부설 초등학교였는데 국가시범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들도 우수한 교육인재들이었고 우리는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고 자랄 수 있었다. 지금의 시대처럼 과외학습이나 선행학습으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이 자유로운 학습 환경이 누구에게나 조성되어 있었다. 이 학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이고 교육청의 업무지시에서 벗어나는 교사의 자율적인 교육이 지금도 실현되고 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당시 후진국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에서 선진유럽의 교육을 제대로 흉내 내고 있었고 잘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의 전형이 우리나라 전반에 확대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것은 교육을 서열화하고 변별력을 만들어 사회 계층화를 부추기는 교육의 실태가 반영된 결과이다.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교육을 통해 공장에서 찍어내듯 훈련하여야 하고 그러한 경쟁 가운데 우수한 인력이 육성될 수 있다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적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였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형식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다니고 관련 학문을 전공하였다는 이유가 그 사람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지는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직업적 우열이 사라지는 선진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사회 분야에 다양한 인재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학생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획일화된 기준의 학습이 제거되어 자유로운 학습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예체능의 경우는 일찍이 제도권 교육이 이를 수행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기존의 획일화된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교육 방법이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국제학교가 설립되어 이러한 교육 환경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엄청난 교육비가 들어가는 그 학교의 프로그램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이를 우리 학교교육에 과감히 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대학입시에 있다. 국제학교가 교육프로그램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학생으로 하여금 자율학습이 가능하도록 설계될 수 있는 것은 외국유학을 전제로 하여 국내의 대학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유학을 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정을 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감안된 결과이다.


 나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며 자기 주도 학습을 할 수 있었다. 한 학급이 70명이었던 당시에 상황에서 필기 위주의 교사의 일방적 교수방법은 학교수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교육 역시 이와 비슷한 교수가 많았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헛웃음을 지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작은 지식을 하나의 틀에 가둬놓고 그 형식에 맞춰 학습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를 학생에 대한 변별의 기준을 만들어 시험을 치게 하고 서열을 만들어 우수한 학생을 가려내고자 하는 행태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학교교육의 전부였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만 나의 학교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 많은 어린 시절을 대부분 학교에서 보내고 수업을 통해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생활에서 우수한 성적을 취득하는 행위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주어진 범위 내에서 문제를 통해 시험에 익숙해지면 되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공부라는 것이 주어진 범위라는 것도 알고 나면 대단한 것들이 아니고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의 조그만 지식을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내가 그 당시 미적분을 풀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수학의 어려운 공식을 달달 외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적 욕망이 큰 편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나의 인생에서는 책읽기에 빠져있는 경우도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20권에 달하는 학생대백과 사전을 전부 탐독하였고 100권에 달하는 위인전을 전부 섭렵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관심사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후 성인이 되어 사회과학서적을 포함하여 수천 권의 책을 읽었으니 상당한 양의 지식을 섭렵한 셈이다. 어떠한 지식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또는 새로운 지식에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직관적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남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청소년기에는 실패한 학생이었고 남들이 말하는 일류대학을 나오지도 못했다. 이후 하고 싶은 전문적인 석·박사과정을 해보려는 마음만 있었을 뿐 시간만 보내고 만 셈이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대로 나의 지적능력은 준수한 편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 역시도 그랬고 지금의 많은 학생들도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상 그 필요성을 학생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행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수업은 모든 학생의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과 같다. 나는 오랜 시간 문법을 배우고 단어를 꽤나 외웠음에도 영어 한마디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없는 처지도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험을 치루고 변별력을 만들기 위한 영어수업이 과연 정당할 수 있을까? 이는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영어권 현지 외국학생이 우리나라 대학시험의 영어문제를 보고 풀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 교육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는 수업시간이 자기학습을 전제로 한 보조적인 수단이 되는 이유는 교과과정의 불합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변별력을 기준으로 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상 학생에게 필요한 적정한 수준의 지식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말을 한다. 학습은 자기학습을 통해 스스로 익혀야 가능한 것이기에 교과과정은 이에 합당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학교 수업이 자기학습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과과정이 구체적인 사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이룰 수 없다. 주어진 수업 시간의 범위 내에서 그에 합당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물러야 하고 이를 학생들이 함께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이 경쟁력에 의한 변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에 의해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과목의 다양성 확보와 학생의 자율적 선택에 의한 자기학습이 장려될 수 있는 환경에 있다. 기초학력의 수준을 개념 정의의 수준으로 보편교육이 실현될 수 있는 수준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학력수준을 요구해야 하고 학교수업은 이에 맞춰 시행되어야 한다. 상대평가에 의한 평가제도는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과목별 능력 평가 제도를 도입하여 학생의 선택과 자율적인 학습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외국어 능력 평가, 한문능력평가 등 기존의 능력평가시험의 등급제를 다양하게 모든 과목으로 확대하여 평생교육과 연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지표로 삼아야 한다. 대학입시 역시 이러한 학과별 다양성을 감안하여 필요한 과목의 수학능력을 감안하여 입시전형에 반영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 될 수 있다.


 동양에서 과거제도의 도입은 광범위한 새로운 인재영입에 크게 기여한 제도이다. 당시의 교육기반이 부족했지만 한정된 권력층의 추천이나 세습을 견제하는 방안이 되어 효과적인 인재영입수단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시험방식이 공정하고 효율적이었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면 특정한 형식 이상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시험을 보게 하여 일정한 형식을 통해 선발하였다는 사실은 공정성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다. 당시에도 대리시험을 보거나 남의 답안을 훔쳐보고 또는 시험문제가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 불공정성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교육을 받고 적정수준의 능력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현대사회에서 반드시 시험을 통해 변별을 해야 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은 깨질 때가 된 것이다. 다양성의 실효적 확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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