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반찬을 만들며....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어머니의 반찬을 만들며....


남에게 피해되는 행동을 죽기보다 싫어하시는 어머니다. 어느덧 90의 나이를 바라보고 계시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만들고 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아이가 태어나는 젊은 부부의 감동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축하를 보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죽음에 대한 애도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어머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밥상을 차린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요리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으면 어머니를 위한 요리도 한결 수월해졌고 장을 본다는 것도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특별히 했던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가 불효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나마 오래전 떠난 아내를 대신해 나의 아들을 키우며 손자를 통해 삶의 위안이 되었던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버지의 부재와 나의 사업부도로 인한 곤궁함이 함께한 회한의 세월을 이겨내는 수단이 되었음도 나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의 어머니는 품위가 있는 사람이다. 거동이 힘들고 기력이 쇠하여졌음에도 지금도 아들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 하신다. 8남매의 다섯째였고 자매 중에서는 셋째 딸이다. 큰 이모가 이화여대를 다니실 때 어머니는 서울서 무학여중을 다녔다. 1학년 재학시절 6·25 전쟁이 났다. 그 옛날에 제주에서 서울에 유학을 하셨으니 외가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해방과 함께 40대셨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외삼촌은 서울지역을 무대로 사업을 크게 벌이셨다고 한다. 6·25 전쟁과 함께 서울이 함락되며 큰 이모는 좌익운동을 하던 애인을 따라 월북하셨고 어머니는 친척의 도움을 겨우 받아 어린 나이에 혼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다시 제주행 배를 얻어 타며 겨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남대문 시장 쇼핑 마니아다. 그 후 서울에서 동덕여대를 다니셨을 때만 하여도 외가는 그런대로 재력이 유지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외가는 외삼촌의 연속된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도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이 익숙했던 어머니는 서울을 가시면 남대문을 찾아 반드시 쇼핑을 했다. 배로만 이루어지던 당시의 열악한 제주의 물류상황에서는 물가가 모든 것이 비쌌기 때문에 어머니는 서울서 쇼핑을 하시고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시던 것이 낙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절제된 소비를 하셨고 집안 살림을 알뜰히 챙기는 가정주부셨다. 당시 박봉이던 공무원 월급으로 현명한 살림을 하셨던 분이다. 아버지가 나름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어머니의 공이 컸다. 급속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어머니의 상재는 아버지에게 부동산 투자에 대한 조언을 할 수 있었고 이는 적중하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형이셨던 아버지는 주변에 많은 인심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실속은 못 챙기는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주변의 채무보증으로 많은 재산을 날렸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근간은 어머니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각한 경제 상황에서 다툼이 많았을 법도 했지만 두 분이 싸우는 모습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적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외가에서 온 종일 지내시고는 밤늦게 찾아 온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정도가 큰 부부싸움의 정도였다. 두 분은 주변에서 소문난 잉꼬부부인 셈이다. 어릴 적에 내게 비친 모습은 살가운 아버지와 도도한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를 싫어할 정도로 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계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단순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했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인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감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머니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어머니가 내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부모 모임 등에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셨다. 당시에 서울서 대학교를 다니셨던 엘리트 여성이 자신의 주민등록 번호를 기억하지 않고 살 정도였다면 말을 다한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존심이라기보다 자존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점을 모두 타고난 셈이다. 이제 와서 어머니를 그대로 닮고 있다는 것도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스스로의 정신적 자립을 모색하셨다. 운전면허를 60세의 나이에 3개월 만에 취득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근만 소형자동차를 사 드렸다. 당시에는 어머니의 주변 친구들이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운전사가 되기도 하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하셨다. 그러한 어머니의 노력을 망쳐놓은 것은 나의 사업실패였다. 그리고 이어진 며느리의 죽음으로 맡게 되었던 손자는 운명이 되었다. 내가 아들을 낳게 되면 손자를 절대 돌보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던 어머니의 독립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내 아들은 엄마 없이도 할머니의 사랑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아들은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르며 성장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된 사춘기시절이었다. 나는 착하기만 한 아들이 할머니가 식사도 차려주지 않는다며 자신에게 소홀하다고 짜증내는 것을 보게 된다. 평소 같지 않은 아들의 말에 당황한 어머니를 뒤로 하고 아들과 조용히 대화를 하였다. 할머니가 엄마를 대신하여 너를 키웠고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오히려 할머니에게 한번쯤 식사를 만들어드릴 만한 나이가 된 것이 아니냐고 조용히 타일렀다. 이후 아들은 나의 나무람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할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려 애를 썼다. 나는 이런 아들에 대한 대견함에 죽은 아내의 천성을 이어받았다는 감사함을 다시 느끼곤 했다. 다시 재기를 하고 또 다시 실패를 겪는 나의 인생과 어머니는 함께하셨다. 그리고 그 순간 나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매일 저녁 찬을 만들고 있다. 80세까지만 해도 고운 모습으로 주름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이제는 정말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그 모습이 낯설어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이것도 나의 죄스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에서이다. 세월이 어머니의 얼굴에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짓궂은 질문이 되는 엄마아빠 중에 누가 좋으냐는 질문에 나는 항상 확고하게 아버지였다. 아마도 우리 삼남매의 생각은 같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간이 30년 가까이 이르고 있음에도 내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남아있을 만큼 아버지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 추억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부부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러한 자식에 대한 질투도 없으셨다. 그렇게 담담하게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서 어머니의 찬을 만들어드리기로 했다.


사실 집안일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일상의 반복된 무엇을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 익숙한 일은 당연히 아니다. 가정주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위한 무엇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이 된다. 아들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는 ‘저녁 드셨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항상 ‘먹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차린 밥상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려 하면 그냥 놔두면 당신이 하시겠다 말한다. 그럼에도 내가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면 그냥 건네 보는 말이 되고 있음에도 위안이 되시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작은 심부름 하나를 시키지 않으셨던 어머니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도 항상 부탁의 말투로 나를 대하였고 나에게 당신이 필요한 무엇을 강요한 사실이 없었다. 당신의 아들이 당연히 무엇을 자신에게 하여야 한다는 책임을 지우신적이 없으신 분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신 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도 컸던 이유도 있었다. 어머니의 담담한 감정의 표현방식이 이런 표현을 어렵게 한 것이었고 나의 감정에 와 닿을 만큼 직접적인 표현에 미숙한 어머니의 성격 탓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표현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의심을 품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머니!’ 라는 부름에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말을 농담에 섞어서라도 시작해 보아야겠다. 그리고 나의 아들에게도 ‘사랑하는 아들!’하고 수시로 불러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어머니 사랑합니다!’라는 진정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그리고 ‘아들! 사랑한다!’는 확신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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