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한다. 그 만큼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식상한 일이 될 수 있음에도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식상하게 다가오는 만큼 소홀하게 지나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사랑의 추억은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이 아니란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아픈 기억이 그리움으로 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격렬했던 수많은 감정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려놓기보다 멀리서 스스로를 바라보고는 한번쯤 넉넉한 가슴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대단한 아집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유 없는 감정을 설명하고 이에 대해 논리성마저 가지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에 대한 감정의 기억은 더 그렇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경험도 다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각자가 다른 것이어서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사랑이 상처가 되거나 심지어 혐오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현실에 동의할 수 없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경우에까지 이른다. 양성평등은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이슈가 되어왔고 이제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남녀차별의 문제가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 아직도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함에도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가 왜곡되어지는 이유는 감정적인 이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다는 것은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을 개선하는 것이고 이를 투쟁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극단적 패미니즘이나 여성혐오세력이 집단화하는 경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개인의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남녀문제에 대한 사회적 발전은 투쟁이 아닌 사회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투쟁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 만물은 암수 한 쌍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를 음양의 조화로 인식되어지기도 한다. ‘남과 여’ ‘밝음과 어둠’ ‘불과 물’ ‘하늘과 땅’ ‘양성자와 전자’ ‘공간과 형상’ ‘무와 유’... 이렇게 세상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중첩되는 경계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세계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성소수자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으나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세상은 실재하지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모든 사실에 대하여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고 하여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이를 바라보는 개인의 마음은 통합을 향한 의지의 발로가 되어야 한다. 통합을 향한 절대명령은 다른 것을 포용하려는 의지이고 이해와 관용을 실천하는데 있다.
생각해보면 이를 통해 세대를 이어가고 인류가 존재하고 있다. 남녀가 조화를 이루고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의 끌림을 통해 세상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의 끌림은 인간에게 커다란 깨달음의 기회를 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다. 세상이 다름과 조화를 통해 통합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은 경이로움을 준다. 세상은 다름이 존재하는 것이고 남녀의 조화를 통해 인간은 이를 깨닫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인 시각을 떠나면 세상이 보인다. 다름이 갈등을 만들고 치열한 다툼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이러한 다름이 조화로움을 향하는 목표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이렇듯 해체와 생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가 말하는 ‘인류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는 비단 인류역사의 존재 형식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이는 개인의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개인의 역사에도 같이 적용되는 것이고 인류의 숙명과 그에 대한 노력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사랑이 된다. 그런 이유에서 사랑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감성인 동시에 바람직한 이성의 활동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자의 인식론에서 인도와 동양에 이르는 관념론의 핵심주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고 이를 삶 속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랑이란 말에 뜨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도 젊다는 증거다. 철학적 차원의 고고한 사랑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이성을 통해 설레임을 느끼고 열정을 불태울 힘이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희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의 창을 열라는 두드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감정의 만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사랑은 애욕과 구분되어진다. 지나간 사랑을 추억한다는 것은 드리워졌던 욕망의 덩어리가 치워진 그리움의 세계다. 그리고 부족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되기도 한다. 그리움이 되는 순간 알 수 없는 충만함이 허전한 마음의 한구석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사랑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감춰진 보물 상자를 열 듯 수줍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서툰 생각들과 어리석었던 부족함을 끄집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는 반드시 아문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골마 터지게 되어 있고 결국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까지 이르는 것이 세상 이치다. 사랑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더라도 시간을 통해 아물게 되어 있다. 이렇게 새로운 살 위에 돋아난 평상심은 이를 되짚어보는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사랑은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아름다울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깊은 아픔의 기억은 습관처럼 알 수 없는 순간의 격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감정의 회오리를 흘려보낼 수 있는 것도 인격이다. 인간의 품격은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남의 감정을 대하듯 나의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것도 의지에 대한 훈련이다. 그런 후 얻게 되는 평정심은 감정의 승화를 알게 한다. 감정의 승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인도의 수행자들이 쿤탈리니가 열리는 수행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전설 같은 수많은 수행자들의 영적 경험을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감정의 승화를 통해 이해의 길이 될 수는 있다. 또한 거짓으로 얼룩지고 인간을 미혹시키는 자들을 분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사랑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진리다. 인간의 사랑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감정에만 치우치게 된다면 스스로 지나간 감정에 빠지게 되고 자기변명으로 일관된 아집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이 복잡해지고 이로 인해 정리가 되지 않는 혼란을 겪게 된다면 이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추억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적인 삶의 무게에 병들어 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사랑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가져다주는 특전인 셈이다.
인간의 사랑을 내리사랑이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식이나 손자를 통해 의도하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른다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의도하지 않은 조건 없는 사랑은 사랑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치열했던 남녀의 사랑도 어려운 이를 가엽게 여기는 인류애적인 사랑도 무조건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사랑이 주고받는 거래가 아님을 알게 하고 사랑을 주는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진실을 터득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찬다는 것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영원한 꿈이다. 그러나 포기되어질 수 없는 꿈이다. 또한 이것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되고 있다. 주어진 한정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끝임 없는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보면 궁극적으로 사랑을 이루었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도 아니며 완성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순간순간 인간이 느끼는 한순간의 포만감만을 남기고 끝임 없는 갈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사랑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는 ‘사랑한다!’는 상대에게 요구하는 절규가 아니라 ‘사랑했다.’는 결과를 남기고 있다. 지금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낄지라도 현재의 의지가 미래 또는 삶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임을 믿는 것도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