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들이 친구가 되고 있다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이젠 아들이 친구가 되고 있다.


https://youtu.be/QsAjkU_txPo?si=-3qe1HgS_tsDSuh-


엄마의 사랑을 우리 지수는 한 번도 직접 느껴보질 못한 채 이제 5살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빠에게 우리 지수가 어릴 때 다른 엄마를 구해주라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수의 엄마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다. 한번쯤 우리 지수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때를 쓸 법도 하건만 착한 지수는 벌써 어른이 돼버린 것인 양, 엄마가 보고 싶어도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듯, 독백이나 하는 것처럼 “아빠, 엄마 보고 싶다.”고 툭 한마디 내뱉고는 이내 아빠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엄마, 하늘나라에 있지~”하고 스스로 답하며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 우리 지수는 벌써 사무치는 그리움이 무엇인 지를 알아버렸다. 그리고는 인내를 배운다. 아빠는 그러한 우리 지수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이렇듯 아름답게 성장하는 우리 지수를 항상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으로 엄마에게 감사한다.


지수야! 친구들이 자기를 위한 만족의 본능에 충실한 나이이지만 우리 지수는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어려운 현실의 아픔을 먼저 배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지수는 더 빨리 크는 것이지. 아빠는 엄마의 사랑을 직접 받을 수 없는 만큼 우리 지수를 몇 배나 사랑한다. 아빠는 너의 웃음과 눈물을 통해 유난히도 눈물이 많던 엄마를 바라본다. 아마도 아빠는 평생을 그럴 것이다. 우리 지수의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 만큼 스스로가 채워가는 또 다른 인생이 주어질 것이고 그러기 위한 많은 사색의 기회가 주어지리라 믿는다.


엄마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엄마가 있었으면 엄마는 우리 지수를 끔찍하게 사랑했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가 아빠를 사랑했던 만큼 아니, 아빠보다 더 우리 지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쁘게 커 가는 지수를 바라보며 너무 자랑스러워 모든 정성을 다 쏟았을 것이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 엄마는 우리 지수를 너무도 보고 싶어 했다. 너무도 심하게 부서져버린 몸이 아파도 지수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힘을 다해 살고 싶어 하였지만 하나님은 결국 아파하는 엄마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그러한 엄마의 바램을 너무도 잘 알기에 우리 지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00여 일에 걸친 죽음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빠는 이 세상이 너무도 밉고 싫었다. 내게는 사랑스러웠던 엄마에게 주어진 그 지독했던 아픔을 아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 아빠에게 우리 지수를 남겨주었기에 이 세상을 아빠는 사랑하고 싶어 한다. 나는 너로 인해 그만큼의 세상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35세의 어느 날, 어린지수를 바라보며)


야속하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친구의 아이들은 용돈을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어른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결혼을 앞둔 아이들에게 부조금을 줘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나는 친구의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며 왠지 좋았다. 그러나 친구의 아내들과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관심사였던 시절도 지나간 것이다. 아이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간 친구들은 이제 와서 별거 아니라는 듯 은근히 자랑을 한다. 이러한 자랑에 내 아들과의 괜스런 비교가 머리를 맴돌기도 하지만 나는 역시나 개의치 않는다.


아내가 있었다면 누구나가 바라는 모습처럼 내 아들이 보란 듯이 전도유망한 청년이 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아내는 자신의 아들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대학을 나오고 외국을 유학하고 사회의 엘리트로 키우고자 하였을 것임도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성공한 것은 아들이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해 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엄마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크면서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한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들의 천성이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는 아내의 천성을 타고난 것임도 분명했다. 오히려 나는 방임하다시피 아들을 키운 셈이다.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이 말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한낱 변명이 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다른 모든 것들도 그러하지만 자식을 위해 네가 한 것이 무엇이냐는 가까운 이의 비아냥은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격지심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자신의 자식을 독려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극성스러운 우리 사회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게 된다.


세상이 치열한 경쟁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의 존재방식의 하나임도 분명하다. 경쟁을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가 승자가 되는 길은 없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인류의 역사가 소수의 기득권 권력을 위해 움직여 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낳은 절대적 유산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식이 남들을 이기고 기득권 사회에서 권리를 누릴 확률은 10%도 안 된다는 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서구 유럽이나 미국같이 우리가 모방해왔던 사회들은 사실상 단지 2%를 위해 사회가 존속되어 왔다. 저개발 국가의 0.1%가 선진국의 1%보다 절대적인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간 사회의 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는 보통사람에 의한 보통의 사람을 위한 세상을 지향한다. 이러한 분명한 지향점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사회의 상류층만을 부러워하고 욕망을 키우고 있다. 또한 이것도 현실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러한 보통사람들의 실현가능한 욕망을 부추겼다. 그 이유로 개천에서 용이 난 실화를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종말, 그리고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전쟁의 참상은 우리의 국토만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이 사회의 모든 것들을 갈아엎는 효과를 갖게 된 것이었고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숙제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공정한 경쟁사회의 순기능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교육의 실현이다.


국가는 우수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가 경쟁구조를 만들고 변별력을 키워야 한다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는 방법이 경쟁을 통해 변별력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변별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변별의 형식만을 용이하게 하고 획일화된 바보집단을 만들어 형식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가 획일화하고 정형화 된다는 것은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권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박정희 독재 권력이 근대화의 토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고 결과론적인 시각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를 받칠 수 있는 국민에게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존재가 없었더라도 오늘날의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권력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전통적 사회 기득권 세력이 정치권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오래 동안 독점해 온 변하지 않는 정치권력의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선진국에 진입한 것이다.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정부나 국회가 훌륭한 정책적 판단을 통해 이룬 결과라고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현대사에 새롭게 등장한 기득권의 독점적 사회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성과를 이룬 것은 우리 국민 안에 살아 숨 쉬는 전통적이며 문화적인 국민정서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경쟁이란 사회구조 안에 기득권에 유리한 변별방식만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이 사회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와 공정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현재의 교육제도는 과감히 타파되어야 하고 사회다양성 확보를 위한 보편교육의 실현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어린 아들에게 다른 아이들을 비교한 기억은 없다. 다른 이들과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준 적도 없었다. 더욱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수가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아들의 어린 시절 그러한 것들이 삶 속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가르치고 싶었다. 남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하고 또한 품으려 하는 자세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지금도 나는 소망하고 있다.


아들의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바로 아들에게 시내버스 타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어린 지수에게는 꽤 먼 3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세 번을 함께 하고는 줄곧 혼자 버스를 타고 등교하게 하였다. 다양한 재능을 타고난 아들에게 4살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다행히 내 아들은 천재는 아니었다. 엄마를 닮아 천재성이 있으면 이것을 키워줄 수 있어야 했다. 천재가 한 분야에서 특출할 수 있는 이유는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에서이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리고 내가 천재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편협함에 있다. 천재와 천재성은 이렇게 구분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들은 스포츠에 다양한 재능도 보였다. 골프를 비롯하여 승마, 축구, 육상 등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그러한 것에 집중력을 발휘하고 꾸준한 자기발전을 갖고자 하는 열의가 필요한 일이다. 아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특별한 재능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들은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꾸준하게 쳤고 작곡을 공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기 용돈벌이가 몸에 익은 아들은 군대를 제대하고 곧바로 아르바이트부터 찾았다. 내가 이제 하나의 완성체로 성장한 아들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믿음직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부족해 보일 수 있는 부모였지만 아들과 나의 관계는 성공적인 것이다. 어린 아들을 나의 소유처럼 생각하며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나의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나와의 대화가 이견을 보이더라도 말을 먼저 듣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갖는다. 그것은 아들의 의견에 논리적이고 다양한 판단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스스로의 선택을 요구하는 나의 대화방식에도 이유가 있다. 아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나의 보수적 사고로 인해 갈등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아들에게 나의 인생의 마지막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26살의 아들에게 회사를 만들고 나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오래된 계획 중에 하나였지만 그 만한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며 실패했던 많은 경험들을 함께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사업의 성공에 앞서 아들과 공유하는 세상의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도 나의 인생계획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들의 성장과정에서 아들의 학교교육에 대한 여유를 부린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도 아들은 내가 기대한 것 보다 더 훌륭히 성장해 주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었던 것들이 성공한 셈이다. 아들은 내가 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아들만큼의 나이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에게 맡기는 믿음을 내게 보여주셨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찬 일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그 순간에 아버지가 계셨다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아들이 무엇이 부족한지도 잘 알고 있으며 앞으로 아들이 스스로 다시 배워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서도 잘 알고 있다. 사업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쓰라린 실패를 다시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일이고 보면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삶에 주어진 현실적인 상황들에 대한 서로의 공감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의 기회를 아들은 갖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아들이 나의 영원한 친구가 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