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에 있어
친구란 존재의 의미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나의 인생에 있어 친구란 존재의 의미


https://youtu.be/5nvUknO9Jsg?si=DxDutuy3RBVliQ7x


친구는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란 말만으로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쌓이기도 하였지만 흘러가는 시간이 이를 무디게 하는 것도 사실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친구는 남자들 사이에서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처럼 의리가 전부인 양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 사람들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이 허구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유비, 장비, 관우가 남겨놓은 친구란 의미는 결의와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게 하였다. 기대는 실망도 크다고 하였다. 인생을 살아가며 생각만큼 전혀 다른 현실을 느껴야만 하는 경우가 친구일 수도 있다.


나의 젊음에도 그러한 친구들이 꽤나 많았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나는 20살을 넘어서며 친구의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했었다. 남자들 사이의 ‘의리’가 주고받는 일종의 계약과 같다는 비판적인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로 친구는 내가 살아가며 최우선으로 베풀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고 감사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에 와서도 이런 생각들에 변함이 없지만 이는 마음뿐이었지 실천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굴곡이 심했던 나의 인생에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들만 쌓여가고 있던 셈이다.


사람들에게는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자신과의 친한 정도로 구분한다. 그것은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지나고나니 친한 정도가 의미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각별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또렷해지는 시간과 함께 했던 서너 살 적 친구부터 유치원, 초등학교를 거치며 지금까지 나름의 우정을 쌓아온 많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에 대한 마음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였다. 마음으로 다가오는 친구가 드물어지는 만큼 새로운 만남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였다.


공자가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친구의 의미가 새삼 다가온다. 우리가 학교동창을 가까이 하게 되는 마음씨의 근본은 이러한 배움의 공유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친구가 멀리서 찾는다는 ‘유붕자웅방래(有朋自遠方來)’는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오늘날 거리와 시간만큼 그 귀함도 무뎌졌다. 그 옛날 중국대륙을 생각하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몇 달을 걸어가던 수고만큼 친구는 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친구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생각하면서 결국 나 역시 이기심에 가득 찬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친구는 오늘도 이렇게 나를 일깨우고 있다. 지금 나에게 있어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이기심이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친구에 대하여 내가 먼저 소식을 전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을 항상 느낀다. 나는 항상 내가 먼저 친구를 찾는 경우도 드물었고 그러한 만큼 내게 연락이 없다고 서운함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내가 가진 좋은 모습 중에 하나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를 만나는 경우에도 오래전 감정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도 무뎌지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관계의 근본이 되었던 사람에 대한 자신감도 나를 먼저 찾아주었던 그 많은 친구들이 만들어주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친구들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오랜 시간동안에도 한결같았던 친구의 모습이 나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도 하였지만 사람이 한결같은 모습도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나의 일관된 고집스러운 모습에도 달라지는 친구의 시선과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서운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변해가는 친구들의 마음과 모습 속에서 나 역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한 수준으로 움츠리고 있다. 움추린 개구리가 멀리 뛸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길어지면 습관이 되어버린다. 내가 지금 그러한 순간에 처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만 먹고 펼쳐놓기만 했던 많은 생각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나의 마음을 다잡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고 있다.


친구는 이해와 포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친구들이 내 곁에 존재하는 이유다.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자신을 실망시켜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결국 항상 이해와 포용을 견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필요로 한다. 사랑이란 것이 특정한 사람에 한하여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낯선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되는 것과 같다. 이렇듯 우정은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바로미터가 된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친구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이것을 상처로 받아들인 기억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서운함이 쌓이는 것은 나의 삶을 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감사함을 먼저 생각한다. 내가 나름 풍족했던 시절에는 꽤 많은 친구에게 베풀기도 하였다. 내가 어려운 시절에 다시 되돌려지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내가 생각지 못한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는 순간에는 감사함을 알게하는 자각이 되곤 하였다. 결과적으로 돌려받겠다는 생각 없이 친구에게 베푸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친구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울 수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 나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외면하는 친구도 생겨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과거의 나에 대한 오래된 시기심의 발동이었는지 이유 없는 비판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나를 애써 무시하려는 친구의 의도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도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한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다. 먼저 다가갈 수 없다면 그냥 이해하고 지나가면 그 뿐이다. 결국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시 다가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60세가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병 하나를 가지고 살 만큼 건강함이란 것도 평등해질 것이다. 그리고 70세가 되어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쓸 곳이 마땅히 사라져 돈의 가치가 부의 평등을 만드는 순간도 온다. 모두가 똑같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이 포용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가 살아있어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는 시절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감사함으로 안부를 물어야 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된다. 서로가 친구의 건강을 비는 것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나를 서운하게 하는 일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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