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 대한 소회

생각을 위해 잠시 멈추어 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섹스에 대한 소회


https://www.youtube.com/watch?v=6vg8n5UXSfE


섹스에 대해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서술한다는 것은 그 부끄러움 때문에 왜곡되기가 쉽다. 물론 나는 여기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의견을 말하겠지만 하나하나를 자세히 묘사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것이 말초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미화되거나 논리적 비약을 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로 죄가 가득한 도시였다고 묘사했다.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인간의 죄악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묘사하고자 하는 경우에 성적인 집단적 타락을 이미지화 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경험한 성적 경험에는 각각의 다른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한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도덕적 기준을 삼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정신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당시의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그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외디프스 콤플렉스’와 같은 신화 속 옛 이야기에서 기원을 찾아 교묘하게 사회적 비판을 피해 나갔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 용납될 수 없던 문제를 객관적인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고자 했던 그의 탐구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설명 역시 논리적 비약을 피할 수 없었고 우리에게 무의식 세계의 심연 깊은 곳으로 스스로를 가둬놓는 변명의 수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의 이론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성에 대한 인식을 처음으로 하게 된 때가 10살 무렵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권의 포르노잡지를 발견하고는 새로운 신세계에 빠져드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8살 무렵까지 엄마를 따라 여자목욕탕을 따라다녔다. 1살 무렵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내가 그때까지 목욕탕에서 벗은 여자들의 몸을 어떠한 다른 감정으로 보았던 기억은 없다. 단지 엄마와 비슷한 가슴만을 가진 사람들이 엄마처럼 목욕하는 모습의 기억뿐이었다. 서재에서 포르노잡지를 몰래 훔쳐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사춘기에 일찍 들어선 것이었다. 남자들은 여자의 존재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는 있지만 이러한 변화를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섹스에 대한 첫 경험이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으로 남지만은 않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경험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을 해서만이 경험되어야하고 약속된 사람과의 관계만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러한 기준에 완전히 충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그 만큼의 도덕적 기준을 기대하였던 과거의 시절도 있었다.


섹스의 문제가 도덕적 문제의 기준으로 자리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섹스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양립하는 극단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그러한 것처럼 그 끝은 없다. 인간의 욕망이 절제되지 않는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상호관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섹스란 것도 중독에 이를 만큼 극단적인 병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이런 성적인 방종은 그 결과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지나치게 섹스의 절제를 강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오랫동안 여자에게만 강요되었다. 사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남성중심의 권력사회가 형성되고 종교적 윤리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서서히 남성위주의 성도덕 개념이 자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자의 성적유혹을 단순하게 접근한데서 출발한 것이다. 결국 이것은 남성 사이에 이루어진 성적 타협의 산물이고 이에 시어머니와 같은 기득권 여성이 호응한 결과이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카이사르의 상속을 받으리라 기대하였지만 그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연인이었다. 카이사르의 상속자는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여동생 율리아의 딸 아티아의 장남이었다. 그는 로마 최초의 위대한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이다. 카이사르에게 옥타비아누스는 여동생의 외손자였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참으로 복잡할 수 있는 가계도이지만 모계사회를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성을 붙이는 경우가 가족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이유 외에 광범위한 혈족이라는 고려는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가 친손자와 동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성을 이어받았다.


인류역사는 오랫동안 모계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도 이러한 사회적 흔적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모계사회가 성에 대한 주도권과 선택권이 여성에게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러한 혈족의 개념이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초기까지도 존재했다. 성리학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여성에게 성에 대한 억압을 강요했다. 열녀문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녀문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사회일반의 성 문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들에게 섹스에 대한 이러한 도덕적 윤리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로 볼 때 성리학자들의 이러한 불공정한 노력은 분명하게 성공하였다.


양성평등은 성에 대한 평등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양성평등을 지향하고 있다. 이에 따른 여성의 성적 자유의식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에게 씌워진 성적 굴레를 다시 여성 스스로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억압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였다. 페미니즘운동이 갖게 되는 남성혐오 의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도 여성이 성에 대한 자유로운 의식이 복원되어야 보편적 의식으로 자리할 수 있다. 순결은 허상이다. 여자가 정숙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허상이 여성의 인격과 연결된다는 생각은 지양되어야 한다. 인간의 품격은 인간이 가지게 되는 모든 종류의 욕망에서 스스로 절제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발현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섹스의 경우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인식되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섹스는 생물학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남자에게 있어 오르가즘은 섹스에 대하여 처음으로 눈을 뜰 때만큼 강열하지 않다. 그러나 여자는 처음보다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강렬함이 더해진다. 심지어 자연분만을 통해 출산의 고통 뒤 느끼는 희열은 섹스의 오르가즘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그런 이유로 남자와의 첫 경험은 오히려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심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남녀의 첫 경험은 그 만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번식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으로서의 섹스를 뛰어넘고 있다.


진화론에서 인간은 섹스를 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으로 진화하였다고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최소한의 털을 제외하면 퇴화되어 피부의 접촉만으로도 성적 감성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여자의 배란기뿐만 아니라 서로가 원하면 언제든지 섹스가 가능하도록 진화했다. 인간의 직립보행은 여자의 엉덩이를 흉내낸 가슴을 발달하게 하였고 이는 아기에게 수유를 하는 목적만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다. 인간의 입술은 안쪽의 부드러운 속살이 연결되어 있어 여자의 성기를 모방하여 성적 자극의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입장을 인문학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남녀의 섹스는 사회적 관계 방식의 하나로 인식되어야 한다.


남자에게 여자의 순결은 독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제는 결혼의 조건이 여자의 처녀성이 기준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결혼생활 중 일어나는 불륜이 가정을 깨뜨리는 당위성을 부여받지도 않는다. 섹스의 문제가 남녀 상호간의 신뢰의 문제와 함께 작용하는 분명한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남녀 상호간의 섹스에 대한 독점적 지위가 지나치게 강요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배려가 될 수도 있다. 일부일처제는 생물학적으로 불합리성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성적 메카니즘이 연령별로 차이를 가지고 있어 세 번의 결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부부가 60세가 넘어서면 서로에 대한 성적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사실도 삶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황혼이혼이나 졸혼이란 개념 또한 성적 이해도가 작용하는 경우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섹스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문화권은 섹스를 단순한 후대번식의 필요로만 인식하였거나 성에 대하여 담론하는 것을 터부시해왔다. 그러나 중국의 도교는 섹스를 ‘양생지도(養生之道)’로 여기고 방중술을 연구하고 발달시켰다. 양생지도란 춘하추동 사계절의 자연에 순응하고 모든 만물은 생(生)을 갈구하여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말한다. 중국인의 방중술을 일명 ‘도교 성교법’이라 한다. ‘도교 성교법’을 다룬 책으로서 ‘황제·소녀경’이 있다. 이 책은 남녀 간의 섹스는 건강을 위한 행위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황제와 소녀가 대화하는 형식을 빌어서 다양한 체위, 전희부터 성교과정과 사정 및 완성단계까지 자세하게 묘사했고 또 이러한 건전한 섹스를 통해 어떤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환상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섹스 역시 자신의 노력과 관심으로 나름의 기술을 터득할 필요가 있음도 말한다.


섹스는 남녀 간의 특별한 대화다. 둘만의 은밀한 대화는 인간 객체가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의 경험을 실질적으로 선물한다. 이는 분명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믿음의 바탕이 되고 또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배신감의 크기를 키우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섹스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들어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를 기존의 사회적 관념으로 억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인간의 욕망을 적정한 수준에서 제어하듯 섹스 또한 그러한 기준에 올려놓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관대한 의식을 말하고 있다. 섹스는 어떠한 경우이든 아름다운 인간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기본 의식이 필요하다.


성이 지나치게 억압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적정 수준의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고 자유롭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심한 욕을 할 때 ‘씹세끼’라는 말을 쓴다. 이는 ‘몸을 함부로 하고 여자의 성기에서 생겨난 놈’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욕이 될 수 없다. 여자가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의미 자체도 인정될 수 없는 것이고 여자의 성기를 통해 태어나는 것도 생물학적인 인간의 필연이다. 생명은 어떠한 탄생이든 소중한 것이고 불가침의 인권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화를 내며 내뱉는 말들이 성적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 해당한다. 이러한 성을 비하하는 욕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섹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섹스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이다. 이러한 생각은 매춘여성에 대한 시각, 성희롱과 성폭력, 야동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섹스에 대한 욕구나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반복한다. 마치 의식하지 못하고 숨을 쉬는 것과 같다. 그러한 순간 스치는 감정을 잡고 있게 되면 병적인 상태로 접어들거나 일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섹스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중용의 덕이 작용한다. 욕망의 절제와 과함에 중도를 지키려는 노력이다. 섹스에 대한 억압되지 않는 사고도 필요하지만 섹스에 대한 품격을 부여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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