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산다는 것은 참 복잡한 문제다. 그러한 만큼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보다 단순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초적인 감각이 만족하는 방향으로 이를 단순화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된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함에도 인식의 방법에 있어 보다 바람직하기 위한 노력들로 감사함과 긍휼 또는 자비가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하고 요구한다. 신의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이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휘감기는 모든 종류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신의 은혜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집단적 동질성이 새로운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전히 사랑이란 개념은 인간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당위성을 갖고 있다.
종교의 도덕적 윤리 중에 두 가지 핵심 단어가 ‘감사함과 측은지심’이다. 사랑이란 개념의 실천적 덕목이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인식하는 방법으로 바람직하게 단순화할 수 있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감사함의 덕목은 겸손의 덕목과도 일치한다. 주어진 것에 대한 그대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다. 기독교의 경우는 이를 극단적인 감사로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 극도의 시련과 처참한 현실이나 극단적인 슬픔에 이르기까지 신에 대한 감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간이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것이고 감사의 범위는 이를 제한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것이 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면 걱정은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를 인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삶에 대해 지나치게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도전적이어야 하는 경우나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모든 것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러 한 양면을 모두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 자세의 다른 하나가 주변을 살피려는 배려의 시작인 단순한 동정심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기독교의 ‘사랑’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자비(慈悲)는 사랑에 대한 실천적 덕목을 강조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긍휼(矜恤)히 여기라’는 도덕적 요구가 있다. 한자어를 살펴보면 불쌍히 여길 ‘긍(矜)’과 구휼할 ‘휼(恤)’이 된다. 이는 이슬람교 역시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으며 대중 종교로 확장하게 한 코란의 대표적 교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을 만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명분이 된 대중적 선동이 중세의 전쟁사로 이어졌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이 만드는 역설적 상황임도 현실이다. 생각해 보면 약탈경제와 생존 투쟁을 위한 고대의 전쟁은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순수한 본능적 발로인 셈이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며 현대에 이르러 종교는 사랑이란 가치를 이용하여 오히려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의 차담 했던 종교전쟁은 정치와 교회를 분리하는 결과를 만든 셈이다. 로마교회의 권위가 세계평화를 명분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종교인의 정치권력에 대한 참여를 제한하는 합의도 만들어졌다. 고대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현대의 정교분리사회를 이룬다는 것이 역사적 발전이란 보편적 인식이 자리하게 한 것이다. 항상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만 인류의 인식이 새롭게 발전한다는 사실에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대중적 종교라는 명분으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한 이슬람의 특성이 오히려 종파의 정통성과 패권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는 현실은 지금도 존재한다. 결국 종교의 기능은 그 본질인 그늘진 사회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하고 정치적 중립의 실현과 공정하고 개방적인 운영은 여전한 숙제가 되고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른다.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이황과 기대승의 그 유명한 학문적 논쟁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이고 ≪맹자≫ 공손축편(公孫丑篇)에 나온다.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예기≫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되었다. 측은지심의 경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면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구하려는 마음이 순수하게 발로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박한 자발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단설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근본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주체 또는 도덕적 규범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만으로도 세상을 살기 충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래도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공동체 사회의 이러한 마음이 합하여져 나타나는 현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마음이 사회의 정의가 되고 공유된 보편적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그 사회는 바람직한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한 영향력은 아마도 개개인의 삶에도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자비나 긍휼의 대상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만이 그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실천은 가까이에서 접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부터 마음을 먼저 살피고 상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측은지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실천적 덕목을 말하고 있으며 삶에 중요한 스스로의 노력을 말하고 있다.
‘모든 이를 긍휼히 여기라!’ 이는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기독교의 실천적 덕목이다. 다른 어떤 것도 이를 우선할 수 없다. 사랑을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도 단순할 수 있는 이러한 종교인의 자세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공동체 사회의 완성은 이러한 마음이 합쳐져 대중적 가치를 이루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이러한 가치가 항상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인간의 이기심도 용서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가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문화의 방향성에서 시작된다. 세계인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긍심을 지속시키는 힘은 자신의 주변에 대한 관심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나 ‘모든 이를 긍휼히 여기라!’는 기독교의 명령은 자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른 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관계된 모든 이에 대한 실천적 관심은 결국 자신을 윤택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 사회가 현실성이 없을지라도 그러한 사회적 노력이 실천되고 지속되어진다면 우리사회가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이상은 항상 포기되지 않는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