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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Sep 27. 2022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

 

 어느 날 문뜩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삶이 끝임 없이 요구하는 그 무엇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가 희망보다 삶의 절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울증이나 염세주의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극단주의에 스스로 가두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반복하며 절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삶이 어렵지?’하고 누군가 뒤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능동적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낙담을 가져오게 하는 이유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의 현실을 말한다. 그리고 ‘자살을 하지 않기 위한 설득의 작업이 철학이다.’라고 인간의 고뇌를 정의하기도 하였다. 그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인간 누구나가 갖고 있는 모습이다. 공허와 허무를 말하고 있지만 인생은 어떠한 것도 규정된 사실이 없다. 태양 때문에 살인을 하였다는 뫼르소의 변명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슬픔보다 먼저인 피곤함과 무심함과 함께한다. 이후 벌어지는 이유 없는 살인, 사회화되지 못한 뫼르소의 사회화된 인간들과의 괴리, 뫼르소의 무심함과 자연의 무심함의 차이, 자신의 재판을 통해 깨어나는 의식 등을 그리는 이 소설의 전개는 지금도 삶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교재가 되고 있다.


 헤밍웨이는 수필 ‘오후의 죽음’에서 ‘삶의 퀘렌시아’를 말한다. 퀘런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가 가픈 숨을 몰아쉬며 힘을 모으는 투우장의 한가운데를 말한다. 피투성이이가 된 소를 한 가운데 두고 열광하는 인간의 광란을 상상하면 소의 처지가 인간이 처한 삶의 조그만 쉼의 순간들을 오버랩 하며 떠오르게 한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놓인 죽음의 순간이 아닐지라도 삶 속에서 인간은 삶의 퀘란시아를 항상 필요로 하고 있다. 멈춤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이는 사색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사색의 과정은 니체가 말한 ‘운명에 대한 사랑(카르페 디엠 Carpe diem)’에 이른다. 절망으로 다가오는 모든 삶의 결론은 현재하는 자신의 삶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실패는 없다. 니체는 어린 시절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맹목적인 의지'를 강조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탐독하였다. 이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는 기존 기독교 도덕을 부정하며 새로운 제3의 개념인 초인사상을 낳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대체한다.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다. 쉽게 말해서 밥을 먹는 건 배고픔의 해소라는 '목적'이 있지만 어떤 이유로 배고픔을 해소시켜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은 알 수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이미 '삶'을 가지고 있는데 '삶'을 원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를 비판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에의 의지’로 대체시킨다. ‘살아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삶 그 자체보다는 다른 많은 것이 더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다!’


 ‘신은 죽었다.’ 그가 말하는 초인은 대지(大地)의 의미다. 딛고 서 있는 땅에 충실하려하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고 영겁회귀의 사상을 깨달을 수 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 되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바로 초인이다. 결국 인간은 커다란 에너지의 흐름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인식만으로 삶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인식은 절망 가운데 죽음을 기다리고 가픈 숨을 쉬고 있는 ‘투우의 퀘렌시아’에서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니체의 생각들은 당시 미치광이의 넋두리로 치부되었다. 그가 더 이전 중세에 태어났다면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절대존재에 대한 피존물’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주체로서의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의 시대는 이를 용인하고 있던 셈이다. 더 나아가 유물론까지 이르렀으니 인류가 어려운 발전을 지속한다는 사실에는 이로서 분명해지는 측면도 있다.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현대에 와서 비판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감히 부정되지 않을 만큼 이미 위대한 이정표가 되어 있다.


 통합적 사고는 대립된 사고의 화해와 같은 것이다. 칸트의 초인 즉 실존적 인식이나 유물론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종교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래 전 동양에서 발전한 ‘중용’의 가치가 변증법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 관념철학의 통합적 사고가 실존주의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은 우주를 가슴에 품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통합이 신을 만들었다는 역설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인도의 ‘범아일체’라는 존재인식과도 일치한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인간의 삶이 어렵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순응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절망을 통해 얻는 인식의 해방감은 불교의 ‘해탈’과도 같은 것이고 도교의 ‘도’를 깨닫는 것과도 같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현실이나 절망은 그 이유를 갖고 있음이다. 인간의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그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고 ‘힘에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서로의 존중이 철학적 의미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공동체주의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착하다는 인식은 순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의는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순자의 ‘성악설’이 인간의 본질을 ‘악’으로 규정하여 이를 통제하기 방법으로 ‘법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에 의하여 백성중심사상인 ‘민심이 천심’라는 국가권력의 방향성이 오랫동안 유교적 전통으로 자리할 수 있게 한 이유도 인간의 존엄성을 인지케 한 ‘힘에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의 모든 삶은 무한한 노력과 의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작위적인 물리적 행동이나 의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질문의 답은 보다 명료해진다. 목표를 정하고 투쟁적인 삶에 대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으며 무능력한 자신을 더 이상 비관할 이유도 없어진다. 그러한 이유로 삶에 대한 답도 필요가 없어진다.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삶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에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자연스러운 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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