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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Oct 24. 2022

결혼이 사랑의 완성일까?

결혼이 사랑의 완성일까?


 어느 시절에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란 생각에 골몰하였다. 그것은 가슴을 뛰게 하는 로맨틱한 상상이었다. 그 흔한 연애 소설들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감은 행복한 결혼이기도 하였고 실패한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들은 어린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정형화된 이러한 사랑의 전개가 나이가 들어도 같은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과거의 나의 추억과 동일시하려는 하나의 미련일 수도 있다. 결혼생활이 마냥 행복함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충분한 현실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인간은 그러한 행복한 상상을 포기하지 못한다. 


 부부의 삶이 내게는 부러움이 되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어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더라도 분명히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분명함에도 항상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지금이 어찌 보면 서글프기만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움에 대한 단상을 알게 하고 함께한 순간에 대한 후회를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만큼 남겨진 아들에 대한 애뜻한 사랑이 더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행했던 열정적인 지난 사랑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결혼생활에서 마냥 지나간 감정의 찌꺼기처럼 남겨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현실은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자각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리움으로만 남은 나의 경우에 한한 일이기도 하다.


 부부가 오래 함께한 만큼 닮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한 모습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전혀 다를 수 있는 사람이 만나 현실 속에 타협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기에 현실에 대한 반복된 대화와 생각은 닮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의 순간은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고 생각되고 그에 대한 바램을 갖게 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실천의 노력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히 거니는 모습이 보여주는 감동은 모두의 꿈이 함께 투영된 결과이다.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의 이면을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오래된 부부가 손을 잡고 거리를 다정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갈등과 이해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러한 모습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가 서로에 무관심하면서도 여러 이유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그러한 무관심도 애증임은 분명하다. 부부가 서로를 증오하는 경우일지라도 불의의 사고든 병이든 동반자를 잃게 된 사람이 받게 되는 감정에는 회한과 안타까움이 예외 없이 엄습한다. 애증의 관계에 있는 부부일수록 오히려 미묘한 감정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자아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은 인간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부부가 영혼을 함께한다는 것도 인간의 꿈에 불과하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젊은 날 연애시절의 이러한 환상과 믿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지난 날 나는 아내와 같은 꿈을 꾸었었고 아내가 가고 없는 지금도 이를 포기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제와 주변을 살피게 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 되고 있다.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서도 서로를 위한 배려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부정적인 것들을 보게 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 의미를 발견하는 작은 것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삶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자신의 작은 진실한 울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항상 옳기 때문이다.


 부부는 특별한 대화를 한다. 부부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사실은 특별한 대화다. 인간이 생각하는 논리나 합리성을 모두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갖는 선택적 망각에서 시작된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려는 의미 없는 몸부림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올바른 이성이 올바른 감정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간이 갖는 무조건적인 이해와 포용은 남녀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알게 하는 축복이 되는 셈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경험’은 남녀의 사랑을 통해 알게 하고 인간의 직관을 통찰케 하는 인생의 유일한 경험일 수 있다.

 

 일부일처제를 인류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오래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운도 아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고 살고 있다는 것들도 사실이다. 여전히 결혼이나 성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생계의 수단이 되고 있는 현실은 존재한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는 지금도 존재하고 일본의 요바이 문화가 많은 문화권의 성문화였다는 사실도 그리고 현재의 방식으로 요바이 문화가 모양만을 바꾸고 있기도 하다. 남녀평등을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성의 우위는 남성에게 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가 완벽하게 자리 잡는다는 것이 머나먼 미래 일일지라도 그러한 인류의 방향성은 옳은 것이다. 


 결혼의 목적이 행복에 그치지 않는다. 행복만을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결혼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행복이 자기 안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 인간의 모든 행복이 감사함에서 시작된다는 인식과 그 맥을 같이한다. 결혼의 결과인 자식의 존재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어떠한 결혼이든 감사함의 여지는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한다. 인간의 감정 역시 그렇다. 반복된 감정의 세계는 무뎌지기 마련이고 그러한 익숙함은 과거의 감정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있을 수 있는 상대의 외도 역시 당연한 과정일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현실이다.


 ‘같지만 다르다.’라는 차이는 남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다르지만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부부에게 주어지는 숙제이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의 꿈은 인간의 인생에 주어지는 책임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그리고 ‘인생에 주어진 모든 세계를 사랑하라!’ 부부의 사랑은 이에 대한 배움을 강요하고 있다. 


 결혼은 누구에게나 흥분된 경험이다. 결혼이 현실이 되고 책임의 무게가 주어지는 것임에도 그 순간은 나에게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행복감을 선물하였었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온 아들의 탄생과 성장은 지금도 기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들이 순간순간 나의 존재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행복감을 지속시키고 싶은 것이 인간이지만 함께했던 두려움의 크기가 이내 현실이 된 것이 아내가 사라진 현실이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나의 인생에 남는 것이었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은 차분히 인생을 돌아보고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제는 나의 인생이 참으로 차분한 명상의 시간들이 되고 있다.


 간디의 인생을 생각해 본다. 인도에서 살아있는 성자로 추앙받았으나 그의 결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 그의 결혼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16세 때 아내와 관계를 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금욕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결혼 적령기의 많은 여성들과 목욕을 함께하고 누드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종종 한명 또는 한 명 이상 많은 여성들과 한 침대에 들었다. 하지만 간디는 자신의 금욕을 시험하는 고행이라 말하였고 그러한 여성들과 관계를 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수많은 정적과 시기에 둘러 싸여 있던 당시에 이를 폭로한 여성이 없었다는 사실에는 그의 말은 신뢰할만한 이유는 있었고 후대는 그의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한 그의 기행은 한 살 위 아내인 카스투르바를 외롭게 하였고 간디의 명성이 그녀를 정치 활동가이고 또 하나의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기는 하였으나 이 모든 것들을 그녀는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주위 정적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진 그의 큰아들 할리랄 간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도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며 '작은 간디' 라는 이름을 얻으리만큼 노력하였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다. 노숙자였던 아들은 간디의 장례식에 남몰래 참석했지만 아버지 간디가 7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해 세상을 떠난 1948년 같은 해에 알콜 중독과 우울증에 빠져 봄베이의 한 병원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간디의 인생이 모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의 시각으로 그의 가정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 된 생각이다. 그의 삶의 고행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일체성은 그가 삶 속에 보여주는 기괴할 수 있는 행적이 되고 있다. 그리나 그는 현대사회가 가져야 할 분명한 위대한 가치를 남겼다. 평생을 함께한 간디와 카스투르바가 보여주는 결혼의 또 다른 이면은 무엇일까?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의 결혼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파란만장했던 그들의 결혼과 삶이 남긴 것은 그럼에도 평생을 함께 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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