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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와우 Dec 08. 2022

완장이 갖는 함정

완장이 갖는 함정

 

 윤흥길 소설 《완장》은  박정희ㆍ전두환에 이어져 내려온 군부독재에 대해 비판하고자 이 소설을 집필하였다. 소설 《완장》이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되던 1981~1982년은 전두환 정권시절이다. 그 시절 TV문학관에서 단편드라마로 제작되었었다. 나 역시도 어린 시절이다. 완장을 찬 주인공의 악행의 의미에는 정치현실의 고발이라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어린 나에게 평범한 인간이 갑자기 주어진 작은 권력이란 것에 사람을 변하게 하는 인간의 악마성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악인과 선한 사람은 본래가 그렇게 생겨나는 것처럼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완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민족에게 완장은 삼베로 만든 장례에서 상장으로 상을 당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옷깃이나 소매 따위에 다는 정도가 다였다. 이것은 상주가 집안 어른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는 죄를 만천하에 자복하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가 일제 강점기 이후 '완장'은 군과 경찰은 물론 행정 관서에서 일종의 위계나 권한의 표지로 남아서 폭넓게 쓰였다. 당직, 민방위 훈련 때의 공무원들, 주번, 선도부 등이 찼던 완장은 권위주의의 상징이었고 일제와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완장을 권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축구에서 주장을 표시하는 수단인 것처럼 완장이 갖는 권력의 의미는 사라졌다. 형식은 그대로 남지만 대중의 의식 변화는 그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견고한 형식이라도 인간의 보편화된 인식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한 차원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여전히 형식에 메여있는 모습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의 통념에 의한 것이든 자신의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든 그러한 형식들이 정체성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경우들이 많다.


 우리시대에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많은 공감을 받았다.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 현상을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 집약시키고 있었지만 그 공간은 모두에게 공감을 끌어내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등장인물에서 자신을 투영하는 캐릭터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선악의 문제로 접근하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학교라는 환경적 요소가 이 사회의 축소판이었음은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누구나 공감하였던 학교의 모습이 이 사회 전반에 걸쳐져 있었던 사회문제였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작은 소집단에서도 우열이란 것이 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는 반장이란 관습도 존재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 되고 있지만 나 역시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 경험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그러한 행동에 상처가 남은 친구가 있어 마음에 새겨둔 친구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러한 권위가 통념적으로 수용된 것이었기에 친구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망각된 기억 속에 막연함으로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사회통념으로 자리한다. 소집단을 이끈다는 의식은 누구나 대장이 되어야 했고 권위주의문화를 이미지화하고 있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완장’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작은 권한이라도 주어진다는 것은 희생과 봉사를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그 시절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행태들이 지금은 과연 변하고 있을까? 변화의 모습은 분명 이루지고 있을 것이지만 그 시절 통념에 젖은 교사들의 모습에서 학교사회의 변화는 요원한 것일 수도 있다. 보편교육의 실현은 일방에 의해 교육한다는 사회교육의 수단으로서의 생각에서 탈피가 우선 필요한 문제이다. 또한 학교라는 집단이 청소년기를 거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사회로서 존중되는 인식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형식이란 것이 모두 부정되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 의미나 가치가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느냐는 기준과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느냐는 지향성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순한 명제의 실현조차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보면 보다 바람직하다는 인간의 판단은 그 실천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형식의 유연함은 인간이 만든 모든 방식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변한다는 말도 있다. 항상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동시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주어진 자리를 통해 올바른 권력행사를 경험하는 것은 사람을 크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책임진 자리가 사람을 다루고 통솔하는 기술적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완장을 차고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모습이 현대사회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질적으로 사회의 모든 종류의 권한이 다양해지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한이 새롭게 생성되는 현상도 포함되고 있다. 최고 권력에서 하부로 위임되는 직계구조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합의된 권력이 새롭게 등장하며 구성원의 권한을 합의하여 위임하고 있는 사회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회 권한의 다양성은 현대사회의 핵심 변화 중 하나이다. 사회가 민주적 체제로 완성되어가는 현실은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이제 개인에게 있어 ‘완장’은 경계의 대상이다. 누구에게나 권한을 위임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책임에 주어지는 것은 희생과 봉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치인을 선출하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그래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권력이 주어지면 모든 인간은 그 권력에 취하게 되어 있다.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도자는 대중과 공감하기 위해 과정을 중요시하는 인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모든 사람이 강력한 리더쉽을 요구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강력함이란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과 공감하려는 의지와 대중적 설득력을 말하고 있다. ‘완장’에 대한 경계심은 최고지도자라고 달라질 이유가 없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주변에서 완장을 찬 사람이 많아진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권한이 위임되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권한에 대한 인식과 사회참여는 공동체주의를 완성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삶의 바탕에는 안전과 풍요로움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공동체는 그 바탕이 된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관용과 포용의 정신에는 ‘완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 역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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