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인간의 삶에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극적인 전환점은 있다. 대부분 그러한 순간들이 지나고 또 한참을 지난 후에 스스로가 어렵게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에게 후회와 안타까움을 가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생을 서글프게 하는 이유이다. 이제 나는 지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평정심을 갖으려 하게 되었고 나로 하여금 멀리서 아득히 자신을 바라보는 모양새도 갖게 되었다.
중년이란 나이가 삶을 충분히 경험해서일까? 아니면 아직도 내게 삶은 가르침을 강요하는 것일까? 이제는 내가 걸어왔던 인생 속에 서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이 얼마나 중요하였고 또한 얼마나 많은 결단과 노력을 필요로 하였는지를 알게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주어지는 삶 또한 또 다른 배움이 끝임 없이 반복되어 요구될 것임도 알게 한다.
돌이켜 지난 시절 그때의 영감으로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는 것도 마냥 새로워진다. 그것은 아련했던 추억들이 새로운 것인 듯 아득하게 다가오게 하는 작업이 되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중년의 평정심도 한 몫을 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순간 잊었던 것들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더듬어 올라오고 있다.
그때는 그 순간이 최악의 삶을 넘어서는 과정이라 생각하였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 애를 썼다. 극복의 문제라는 생각보다 그것을 넘어선다는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인생의 말년에는 차분히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며 남의 이야기를 쓰듯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소망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나면 그러한 자긍심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오는 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지난 감정들은 잊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한없이 흔들리며 되풀이되었던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다시 두려워하게 하는 그것들 중에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음도 강요받는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뒤엉켜 무엇을 잊고 무엇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지 나를 혼돈 속에 빠뜨리는 냉혹한 현실과 이로 인한 상실감은 다시금 이 사유의 여정 위로 끌어들이는 이유가 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순간만은 그렇다. 그러나 이 고뇌의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뚜벅이며 인생을 다시 걷고 있을 것은 분명하다.
목석처럼 마냥 서서 돌아가는 현실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얼어붙은 두 발이 두려움에 떨려 흔들리고 숨을 쉬기 힘든 답답한 가슴을 두 팔로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어 본다. 이 걸음이 당차게 땅을 박차는 그 날도 반드시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다시 희망이란 것을 가지고 아직도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삶을 가다듬는 또 다른 의지의 시작이 된다. 이렇듯 내 자신이 버거워질 만큼 힘이 들 때도 스스로를 한발 물러서 바라볼 수 있는 내 자신에 대해 그 무엇이 내게 내려준 커다란 선물이 되고 있음도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렸던 시절에는 주어지는 인생의 특별한 기회들은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냥 무심히 내 것이 되어 있어 애써 그것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 기회란 것이 또한 항상 주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시절 나는 스스로 너무 깊이 빠져버린 감정에 마냥 스스로를 방치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참으로 치열한 사랑이었다. 그리고는 인생이란 것이 맘과 정성을 다하더라도 원하는 것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울부짖었다. 그것은 나의 아집을 깨뜨린 하나의 필연적인 굴복이 되었다. 15살에 시작된 12년에 걸친 사랑의 열병은-사유, 자아의 분열, 주관의 확장, 우주적 세계의 포용, 인간의 한계성, 인류의 보편성, 삶의 원리와 응용, 물리적 현상의 인문학적 인식,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다양성을 인정 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들 속에서 나는 삶의 방법과 인식이란 것들을 알게 한 것이다.
나의 청년시절은 늦은 학업을 뒤로하고 사업을 하였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충분한 기회도 주어졌다. 현실에 방만해진 생각은 나를 자만하게 하였고 결국 완벽한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한다. 다하지 못한 학업, 하늘같은 자상한 아버지의 죽음, 사랑했지만 그 가치를 몰랐던 아내의 죽음, 인생에 대한 상실감, 사업의 부도, 한 푼의 돈도 없었던 지독한 생활고, 지인들의 비아냥과 배신, 끝임 없이 독촉되는 채권자의 독촉 등 이러한 것들과 함께 나의 30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살같이 지나는 시간은 나를 중년의 시간 속으로 던져놓았다.
그러나 나는 패배감 속에 한순간도 나를 던지지는 않았다. 내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용기 있는 젊은 삶이었음은 분명하다. 나의 젊음에는 신념과 확신이 항상 있었다. 인생에 대한 자신감, 실패 속에 냉철했던 꿈과 희망, 나를 배신한 모든 것에 대한 용서, 경제적 가난함에 대한 수용, 경험으로 축적된 실력. 그러한 의지들은 30대의 나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한 기회는 이제 와서 또 한 번의 실패를 강요받고 말았다. 치밀하지 못한 준비성과 냉정을 잃은 관용, 현실에 대응하지 못한 치졸함, 현실에 안주한 나태함과 같은 누구나 변명으로 사용될 수 있는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다시 한 번 용기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삶의 몸부림을 치고 싶다. 그리고 인생이 저무는 나이가 되면 다시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하며 부질없는 회고록을 차분하게 쓰고 싶다. 그때쯤이면 나의 인생에 세 번째 사랑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가치는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절대가치를 바라보고자 하여도 이룰 수 없어 애써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서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책임과 노력이다.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결국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자각조차 오히려 어느 사이 자신을 한없이 움추리게 하는 현실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두려움으로 떨게 하는 역설이 되고 있다. 이것은 내게 주어지는 참 혹독한 인생이다. 나의 인생에 실패의 경험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반복되어지는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제는 작은 낙담에도 큰 상처를 받을까봐 조심스럽다. 나를 망설이게 하는 상처란 것들도 나의 육체에 입력이 되어 있어 작은 것에도 다시 아픔이 된다. 아픔을 덮는 인내만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답을 쉽게 주는 법이 없다.
그래도 나의 인생에서 참는 방법을 배웠다. 냉정한 현실 속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치열함을 머리와 가슴으로 느낀다. 내 소심해지는 가슴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이내 낙담과 상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 지라도 인생에 마지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고개를 든다. 따뜻한 현실을 만들고 싶다. 여유로운 감성들도 되찾고 싶다. 이 사색의 글을 쓰는 여정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나는 이 여정의 끝을 보고 싶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겠지만 그래도 값있는 고뇌의 흔적만은 남기고 싶다.
내 짧은 인생에 많은 굴곡이 있었다. 그럼에도 종이 한 장에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각하면 한편으로 삶은 참 단순한 것이다. 그 단순함이란 본질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본질에 충실하면 답은 단순함에 있다. 또한 기억을 더듬어 그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서 누구의 기억이든 그 무게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망각의 기억만큼 사라진 인생이 누구나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속에 반복되어 감도는 단어를 주섬주섬 모아 본다. 그리고는 사라진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본다.
감성. 치열하다. 참으로. 한없이. 냉정한. 한계. 이기심. 욕망. 절대. 경험. 오만. 변명. 자기합리화. 이성. 고정관념. 아집. 치솟다. 슬픔. 상실. 낙담. 외로움. 두렵다. 찌들다. 불확실. 소심함. 현실......
승화. 카르마. 윤회. 점진적. 균형. 유희. 그럴 수도 있다. 흐른다. 사유. 직관. 인식. 일반성. 다양하다. 포용. 관용. 배려. 충만한. 긍휼. 사랑. 자애. 그러려니 하다. 범아. 우주. 바램. 가능성. 끌어안다. 자기.....
(충년(充年)의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