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위에 글을 썼던 것이 벌써 10년이나 훌쩍 지나버렸다. 컴퓨터 안에 저장된 오랜 파일을 열어본 순간,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훨씬 적어졌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였다. 마치 멈춰 있는 시공간을 타고 건너온 듯 감정의 회오리가 가슴에서 튀어 올라 머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지금 시간을 건너온 생각들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사유의 길을 다시 거닐고 있다. 그 순간과 다른 것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나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에게 있어 10년의 시간은 느낌으로는 꽤 긴 세월이겠지만 다시 10년이 지나고 다행히 내 인생이 허락된다면 이 글이 계속 이어질 수 있으리라 다시 소망해 본다.
10년 후의 내가 10년 전의 글을 보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처럼 과연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바램이다. 나의 시간이 어디까지 허락될지 알 수 없는 것이고 이제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음의 평화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대의 생각의 결과가 40대의 글 속에 그대로 이어졌던 것처럼 나의 의식의 흐름은 젊은 나의 모습이 10년 후에도 나를 다시 일깨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뇌의 흔적을 남기는 어려움을 알고 있음에도 삶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이 나의 전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생은 그럼에도 세월의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날은 반드시 온다.
역사적 인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에만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나이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그들의 대부분의 업적은 오히려 젊은 나이에 완성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다른 인물을 비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마르크스(1818년)와 니체(1844년)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을 것 같았던 그들이 불과 26년 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대한 사상가 니체가 칸트(1724년)나 마르크스 보다 후대의 사람이었음도 의외라고 가끔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니체의 대표저서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파스칼의 《팡세》, 단테의 《신곡》과 같이 장편 서사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니체를 어리고 아직은 부족한 어린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사람은 남을 인정하거나 특히나 자신 보다 어린 사람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상 위대한 사상가나 예술가들도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대부분은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 독일 계몽기의 비판 정신을 대표함과 동시에 독일 고전 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철학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창시자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이고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적 바탕 위에 바로 세우려 했다. 그의 사상은 우리의 젊은 시기를 열정으로 뒤흔들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논리정연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반면, 니체는 실존철학의 선구자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직관적 경험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정신병자의 넋두리일 뿐이라고 혹평받기도 할 만큼 관념적인 성경적 모호성을 남발하였다. 이 작품에는 니체의 중심사상인 힘에의 의지, 초인, 영겁회귀 등의 비유와 상징 및 시적인 문장으로 전개되어 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크리스트교 중심문명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고 사람들에게 삶의 허무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설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하고 어려운 철학적 산문시를 이해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함에 답이 있다. 그것은 그의 사유의 여정과 표현의 의도를 간파하는 것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함이란 단지 간단하고 쉬운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만 바라보면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표현은 나무를 바라보며 그 숲을 인지할 수 있는 인지능력으로서의 단순함을 설명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는 객관화의 힘에서부터 비롯된다. 마치 하나의 나무 형상이 숲의 모습으로 확대되고 대륙으로 이어지며 둥근 지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것과 같다.
자연과학은 사실여부가 분명하다. 결국은 무엇이 옳은 지가 분명히 규명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처럼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실의 경우는 여러 가지 이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 과학적으로 대부분 규명되어진다. 그러나 인문학은 다르다. 그것이 귀납적이든 연역적이든 소위 과학적 검증과정을 제시하며 최초의 추론을 증명하지만 도달한 결론은 또 다른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자연과학의 결론처럼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옳고 그름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것은 절대가치의 존재이다. 인류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그러한 절대 가치를 찾아 발전하고 있다.
인간존엄, 만민평등, 민주주의, 인류애, 가족, 자유, 평화, 사랑, 성실, 배려, 정직.... 등. 인문학적 절대가치는 위와 같이 많은 개념들을 나열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또한 부정되는 사회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이 절대가치의 가부 또는 그에 이르는 과정들의 옳고 그름의 논쟁은 끝임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규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인문학자들 간의 논쟁은 비판을 위한 비판의 반복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현실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인문학 이론서를 읽다보면 특정한 사람에 대한 연구가 마치 필연적인 양 사소한 오점을 찾아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서 자신의 지식적 성과를 과시하고자 하는 인간의 과욕을 곳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조차도 스스로 만든 자신의 창으로만 세상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일명 이러한 ‘말꼬리 잡기’는 대상이 의도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이를 주장하는 사람의 의해 고의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무의 몸통을 두고 시들은 나뭇가지의 끝을 잡고 나무를 통째로 흔드는 행위들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흔하게 보게 된다.
단순함은 인문학자의 경우에 그가 연구대상에 대한 평생을 두고 말하는 그의 주제는 분명한 것이고 누구나 단순히 요약될 수 있다. 이 주제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단순함의 실현이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고 우주적 가치를 통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치는 그 법이 갖고 있는 법의 목적에 따라 세부규정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정치를 하는 경우나 개인의 경우도 분명한 절대가치에 준하여 무엇이 보다 바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단순함’은 ‘보다 바름’이 선택 기준이 될 수 있다.
“디테일에는 악마가 숨어 있다.” 인간의 논리는 악마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한 끝없는 자기변명과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유와 변명의 성벽을 만들고 있으며 자신의 생활 속에서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 있다. ‘논리적’이란 용어는 사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고 수긍할 수 있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즉, 논리적이란 단순히 말이나 표현을 잘하거나 그럴듯한 기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의를 표현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고 ‘보다 바름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함의 방식을 말한다. 이는 ‘다양성의 통합’과도 뜻을 같이 하고 있다.
나는 위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의 나이를 얘기했다. 사실상 인간이 20세의 성인으로 성장하고 스스로의 생각이 정립되면 10년이든 30년이든 50년이든 그 차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실을 사는 인간은 예술적 천재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면 쉽게 인정되어질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평범한 성장이 남도 그러기를 바라는 시기심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보잘 것 없는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단순함을 가질 수가 없다. 자신의 다양한 삶의 경험을 줄줄이 널어놓기만 하고 본질에 대한 접근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숲을 보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나는 이제부터 지난 글에 더하여 다음의 문제들을 순서 없이 사유하고 의식의 흐름을 확장하며 거닐고자 한다.
• 다름, • 정도 • 보다 바름 • 배려 • 사랑 • 여자와 남자 • 섹스 • 정의 • 공동체 • 죽음 • 정치의 이해 • 신과 악마 • 깨달음 • 나눔 •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