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삶은 나를 속였다③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결국 삶은 나를 속였다③


몇 주가 지났다. 그녀가 내게 먼저 전화를 했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나는 기대감으로 설레고 있었다. 그녀가 약속 장소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이것이 아니다!' 라고 직감한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요동친다. 떨림...... 그녀와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조급함을 느꼈다. 가슴이 떨리고 어깨가 경직된 채 다리마저 긴장감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육체...... 맥박마저 점점 급박해진다. 숨막힘으로 머리가 혼란스럽다. 정말 어쩔 수 없음인가? 왜냐는 자문을 스스로 포기한다. 애써 이러한 자신을 통제하려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참으로 명랑했다. 아주 자신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내게 와서 앉는다.


"오빠, 나 결혼하기로 했어!“


그녀의 설명은 그녀답지 않게 장황했다. '나는 현실적이며 이기적인 나쁜 사람이고 그러니 나 말고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이것은 정말 나의 진심이다.' 그렇다. 그녀의 모든 말은 그녀의 진심이다.


"미안해. 축하해줘" "꼭 오빠의 축하를 받고싶어."

"....“


나는 그녀의 결심이 번복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었을 것이다. 그에게 나의 존재를 알게 하고 나의 사랑조차도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먼저 갈래?“


내 목소리는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며 일어서 나갔다. 나는 뒤돌아보는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지 1년. 그렇게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극도의 무심한 상태로 변해갔다. 무상함. 내가 세상에 무엇을 바라고, 진정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도 세상은 내게 어떠한 당연함으로도 베풀어지지 않는다. 내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사라지면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을 진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죽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슬픔을 참지 못해서도 아니다. 오래전처럼 분에 겨워 낙담이나 상실감에 내 자신을 이길 수 없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무의미였다.


쇼펜하우워는 자살이 인간의 특권이라 했다. 카톨릭의 도덕적 가치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그는 신성에 대항하여 '자살은 인간의 의지다.' 라고 주장한다. 나 역시 살아있는 인간 어느 누구도 자살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도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마지막 호기를 부리며 잔뜩 취했다. 친구들은 나의 죽음을 분명히 안타까워 할 것이다. 그들이 받는 충격과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남의 일이니 작은 기억으로 치유될 것은 분명하다. 한참 주량을 넘어선 술자리는 오히려 나의 정신을 온전하게 한다. 내 방은 원래 아버지의 서재였다. 당시 우리집이 지어졌을 때는 제주시내에서 유일한 3층 저택이었고, 3층에 옥탑방처럼 남북으로 창을 연 꽤 넓은 방은 혼자를 만끽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었다. 아침에 창을 열면 한라산 동쪽능선을 차고 비스듬히 올라오는 아침햇살이 내 침실을 비추고, 북쪽을 향한 창문을 열면 수평선 너머의 남해의 섬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 창가에 있는 나의 책상은 12년이란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그녀의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는 해가 붉어지면 어김없이 그녀의 2층 옥상에 있는 TV안테나에 걸려 빛난다. 아침에 찬란한 태양을 보고 광활하게 펼쳐진 수평선 위로 남해의 산등성이가 나와 다른 세계를 알게 하고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보며 나는 성장해 왔다. 호연지기...... 내 방은 어린 나를 그렇게 키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었지만 나는 그 방에서 그녀의 불꺼진 창을 바라보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세상을 온전히 알게 해준 네게 마냥 감사하고자 한다’

'행복해라. 라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다. 나는 너를 통해서 인간의 인생이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잘 있어라! 이것이 단지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수면제 150알. 치사량이 훨씬 넘는 양이다. 거기에 술까지 더했다. 소주 한 모금에 20알. 30알....150알 모두를 털어 넣었다. 자리에 누웠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나는 너무도 편했다.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황홀함은 기다림의 환희였다. 막연한 두려움도 없이 그것을 넘어선 세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내려놓음은 환희를 주었다. 깊은 잠에 빠진다. 7년 전 그토록 애원했던 영원한 잠이다.


시간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주변이 환하게 밝아온다. '또 다른 세계인가?' 나의 의식은 혼돈 속에 요동친다. 유체이탈이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잠자는 나의 육체를 보았다. 순간, 엄청난 통증과 기운이 회오리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다 무엇에 붙잡혀 끌려 들어오는 듯 했다. 눈을 떴다. 육체의 모든 구멍을 통하여 엄청난 기운이 폭풍우치 듯 드나들었다. 순간 죽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나는 죽어야 한다.'는 이 한 가지 의식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나의 의식과 영혼의 싸움..... 육체의 고통을 비로소 느낀다. 엄청난 고통은 나의 의식을 굴복시키고 만다. 기었다. 3층 계단을 구르며 내려와서 1층에 자고 계시던 아버지를 깨웠다. 병원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영문을 전혀 모른 아버지의 근심을 뒤로하고 나는 엄청난 양의 수면제를 뱉어내며 고통과 허탈함 속에 다시 잠이 들었다.


'신이였을까?‘


며칠을 무의식 속에 있었다. 눈을 떴다. 아버지다. 세상 처음으로 아버지의 가장 초췌한 모습을 본다. 아버지의 덥수룩한 수염은 내내 나를 지키고 계셨음을 알 수 있었다.


"네가 어찌 그럴 수가 있니?"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눈물.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음을 아버지의 눈물에서 느낄 수 있었다.


(충년(充年)의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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