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기다릴께. 7시에 거기서 보자.“
“........”
전화 너머로 그녀는 대답이 없다. 나는 그녀가 임시교사로 다니는 피아노학원의 교습을 마친 시간에 그녀가 약속 장소에 어김없이 나온다는 것을 안다. 6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었을 수도 있다. 오후 3시쯤, 미리 약속 장소에 나가 그녀만을 기다리며 한 권의 책을 읽는다. 약속된 기다림. 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사랑으로 충만한 감성에 쌓여 여러 시간을 보낸다는 것.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오래 기다렸어? 언제 온거야?"
"3시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린다. '설마'하는 표정이다.
"네가 올 것을 아니까,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아!"
그녀는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안다는 듯이 미소를 지은다.
"올까 말까 망설였니?"
"아니."
나나 그녀나 하고 싶은 말은 참 명료했다. 선문선답처럼. 우리는 짧은 대화에 서로의 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다. 서로가 장황해지면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와 나의 만남은 긴장감이 있었다. 그러한 긴장감은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게 하였고 서로가 사랑하는 또 다른 모습의 방식을 만들고 있었다. 돌아오는 택시 뒷자리에서 그녀는 내 어깨 위로 그녀의 머리를 기댄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오래된 연인들처럼 자연스런 사랑스러움을 탐닉한다.
"오빠! 나 오빠 사랑하는 것 같애.“
첫키스. 또한 그녀와의 마지막 키스. 그날은 그녀가 안전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는 표정과 그녀의 몇 마디에서 그녀의 남자와 심한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슬퍼보였다. 나와 그녀의 남자와의 상관관계. 그녀의 날카로운 말투는 그녀의 남자와의 갈등의 정도를 얘기하고 있었고, 그녀의 여유 있는 모습은 그와의 관계가 원만함을 의미했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여자였다. 또한 그러한 그녀의 의지만큼 나는 더욱 더 빠져들었다. 자기의지가 분명한 사람. 나는 참 어려운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슬픔 속에 빠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감싸는 나의 사랑에 평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느끼는 평온함에 따르는 나의 고통을 모르고 있었다. 또한 그만큼의 나의 인내와 노력을 그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그러한 사람이었다.
여자의 이기심. 여자는 머리로 행동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행동 한다. 자신이 만든 단순한 감정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 머리로 하는 말은 여자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감정을 이해시키면 머리는 그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갖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모든 삶의 의미를 부여했듯 그녀도 그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녀를 향했던 오랜 시간의 모든 의미를 그녀가 알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할 뿐 내가 부여하는 의미의 가치를 살펴보는 어떠한 배려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를 향한 배려의 창을 조금만 열었더라도 그녀는 결코 나를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의 순수함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한 서로의 순수성이 그 나이에는 알 수도 없었던 험난한 세상을 함께하는 분명한 힘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만나기 위해 들어오는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다. 자리에 앉아 6년 전 그녀의 방에서처럼 나를 외면하고 있다. 마치 너 때문이라는 듯......
"너 남자친구하고 문제 있지?"
"......."
이제는 그녀도 내가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녀의 마음을 들킨 당혹스러움도 없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스스로 속일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당연한 듯 씽끗 웃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 걱정이야? 내가 있잖아.“
농담처럼 말을 던진다. 그녀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진실이란 것을 안다.
"그럴까?“
그녀 역시 농담처럼 쉽게 대답한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은 접는다. 어차피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질투심도 없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란 표현을 자주한다. 상황에 따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다르지만 나는 바로 그녀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한다.
"오빠 고마워“
대화도 없었는데 시간은 한참을 지났다.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집 앞.
가로등 불 빛 만이 우리를 밝히는 어두운 밤이다. 지나는 사람도 없다.
"들어가."
".......“
그녀는 가로등 불 빛 아래 대답도 없이 등을 돌리고 한참을 서 있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골목이었지만 습관처럼 누가 볼까 주위를 살피곤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서로가 누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집 앞으로 앞서가는 그녀를 돌려 세운 나의 가슴에 그녀가 안겼다. 힘껏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두 팔을 늘어뜨린 체 힘없이 안겨 있었다. 세상이 멈춘 순간, 나는 슬픔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나는 그녀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내 뺨에 그녀의 볼에서 전해오는 부드러움을 느낀다. 그녀의 체취, 내 입술이 그녀의 볼을 따라 그녀의 입술을 찾아 스친다. 그녀의 흐르는 눈물은 격렬하지 않은 부드러움이 날카로움으로 내 입술을 통해 온몸에 사랑으로 전율한다. 다시 격렬하게 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다시 늘어졌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보았다. 갈등의 슬픔을 보았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
그녀는 백지 상태이다. 그녀는 마치 의식이 없는 듯 무심의 표정으로 서있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돌려 세우고 어깨를 밀어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녀는 터벅거리며 그녀의 집 대문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나는 후회한다. 그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나에게 맡긴 것이었고 그때는 그녀가 완전한 내 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전율케 했던 그 첫키스의 추억도 이제는 잊혀진 기억에 불과하지만 이후 나는 어떠한 육체적 쾌락도 이순간의 감동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육체적 사랑의 감동은 부여된 의미의 가치만큼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후에도 누구를 그 만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었으며 이렇게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이 한 번의 사랑은 두 번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것은 미친 짓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간절함. 그 간절함은 나에게 날카로운 키스의 전율을 알게 했다. 그날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용기 있게 꺾었어야 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결국은 엄청난 욕심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온전한 그녀의 선택과 의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나의 사랑이란 것이 이미 선택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