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서울서 내려오기로 결정한 날,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다. 6년만이었다.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고 그녀는 서울서 대학교를 마치고 제주에 내려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서울에서는 내 주변의 그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과의 접촉도 없었고 나는 그녀의 소식 한번을 들을 수도 없었다. 또한 제주도란 곳이 공항을 통하지 않으면 드나들기가 어려운 곳이라 우연히 만날 법도 했다. 거기에다 방학 동안은 해마다 내려와 있었다고 하니 우연히 동네 어귀에서라도 만날 법도 한데 한 번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때와 다름이 없음은 서로가 지독히도 빗나간 운명에 위치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의외인 듯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셨다. 그리고는 그녀를 바꿔 주셨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만나고 싶은데"
"왜요?"
당연한 대답에 나는 당황하였다.
"만나야지 않겠니? 서울서 내려갈 예정인데 이반하우스 알지?"
"네"
"내일 6시에 보자."
"네"
짧은 통화였지만 오래전에 예정된 듯 아주 명료했다. 그녀와 나의 통화는 시간의 길이를 달리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6년이란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그 순간 나는 나와 전혀 다른 현실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강남 꽃 도매상으로 달려가서 색깔별로 장미를 샀다. 모든 색깔에 세상의 모든 의미를 담고 싶었다. 베이지 색 바탕의 한지 위에 색깔별로 10송이씩 나란히 포개어 비닐로 감싸고 위 아래를 묶어 정성을 다해 한 아름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는 의미 있는 미소를 띠고 꽃다발이 무척이나 이쁘다며 호의를 보였다. 당시의 설레는 마음은 그녀를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흥분되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고민은 없었다. 너무도 많은 그리고 해야 할 이야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 먼저 들어가 그녀를 기다렸다. 기다리면 만난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들어온다. 너무도 성숙해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 나이 26살. 그녀는 25살.
미소를 머금고 자연스레 준비한 장미를 주었다.
"어머! 너무 이쁘다."
그녀의 첫마디다. 그리고는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오랜만."
그녀의 말투다.
"내 마음이야."
"기억하니? 5년이 지나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나를 받아주기로 한거."
"......." "나는 .... 기억이 없는데“
뜻밖의 대답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답한다.
"하긴 그럴 만한 시간이 지났지?"
그 동안의 근황, 지금의 상황, 언니 동생의 안부 등 자연스런 대화를 하며 식사를 같이 했다. 나는 여유 있게 다시 되묻는다.
"생각해봐. 6년 전 네 방에서 내게 약속했던 거"
"그런 것 같애!"
"근데 나 남자친구 있어."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보자."
"안돼."
"안돼긴!" "연락할게."
"...."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면 선택은 나중에 천천히 하자."
"그래도...기대는 하지마"
"알았어. 나는 마음을 비웠어. 그럴 수 있어."
"너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해.“
이 대화는 보여지는 것 그대로다. 당시 나는 이 이외의 아무런 의도를 가질 수 없었다. 아니다. 나는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떠한 의도를 갖지 않으려 했던 것은 나의 의지였다.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은 우리가 6년 전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다. 예전처럼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며 그 길을 걸어 그녀의 집 앞에서 작별을 했다. 나는 그녀의 집을 지나 그녀와 20년을 함께 성장했던 골목 끝에 있는 후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 왔다. 행복했다. 행복감. 나의 인생에 참으로 드물었던 행복감. 그날 나는 놀라운 나를 발견한다. 11년에 걸친 그녀에 대한 집중의 결과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표정,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아닌 그녀의 생각을 읽고 나는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연인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나와의 오랜 시간을 넘어선 한 번의 만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맞은 늦은 대학생활. 음악적인 기초는 꽝. 청음, 시창, 피아노는 그렇고 박자, 리듬마저 몸에 배지 않아 쉬운 과정들은 아니었다. 첫 학기는 두 과목의 전공기초를 제외한 학점이 ALL A. 당시 받은 장학금은 80만원. 수업료의 전부였다. 전부를 아버지는 용돈으로 주셨고, 그녀와의 데이트 비용은 풍족했다. 나는 독일에서 미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꿈을 다시 꾸었다. 그녀가 멈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유학하여 함께 하는 꿈도 꾸었다. 소프라노의 꿈을 상실하고 음악학원 피아노의 평범한 강사가 직업이 된 그녀에게 길은 많다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꿈을 심어주고자 나름의 노력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유복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타고난 한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오랫동안 피아노 소리가 내 방까지 전해왔다. 그녀는 한 동안 놓았던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둘이서 노래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녀가 있는 시립합창단에 입단하여 나는 그녀를 정기적으로 만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소프라노, 나는 테너.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연습에서 나는 그녀를 볼 수 있는 뒷줄에 항상 자리한다. 연습 내내 그녀의 표정과 생각에 빠져있었다.
우리 동네 한복판에는 제주시민회관이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시립합창단의 연습장소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우리 집의 대문 출입을 잘 하지 않았다. 우리 집 후문이 그녀의 집과 가까운 이유다. 그것은 그녀를 자주 마주칠 수 있어서였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고, 성실한 아버님이 이루어 놓은 지역 사회의 명성은 내 자신의 권리인 양 누구의 아드님으로 존재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는 내게 호의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관심을 보여 주시고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동네 어른의 입장에서 보아왔으니 그녀의 어머니의 다정했던 말씀들이 그녀를 사랑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부자집 아들, 아버지의 명성, 마주칠 적마다 인사를 하며 지나치던 예의바른 아이, 형이 없는 당신의 어린 아들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고마운 아이, 당신에게 살갑게 다가서던 아이, 재주가 많아 보이고 똘똘해 보이던 아이, 그녀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노는 어린 나에게 항상 칭찬의 말씀을 주시곤 하셨다. 나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내가 바라는 어머니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어린 나의 조그만 불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공교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재수를 하는 아들을 위해 마련해 준 서울의 조그만 내 아파트는 철길을 끼고 있었다. 서울의 북동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진 철길을 건너면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 되어 화려하게 변신을 하였지만 예전에도 꽤 괜찮은 아파트였을 법 하였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 아파트에 살았다. 그녀는 그 아파트에 가끔 놀러 갔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묻지는 않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사랑의 신의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도 그녀의 남자는 살가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그러했고 그녀의 남자도 사랑과 신의라는 자기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감정에 대하여 책임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의 살가운 표현이나 사랑스런 표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사랑과 또 다른 사랑 가운데 엄청난 갈등을 하였다.
"오빠는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무서워"
"싫어!“
무엇을 결심하듯 무서운 얼굴을 하며 정색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허물어지듯 맥주 몇 잔에 취해 내 품에 안겼다. 다음날, 합창연습을 하기 위해 멀리서 다가오는 그녀는 나를 애써 외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