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톨스토이의 소설로 시작된 독서는 그의 '인생론'을 접하게 된다. 외국 번역서를 읽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고유명사의 발음이 생소한 것이었고 페이지를 넘기면 어려운 이름이 누구를 말하는지 금방 까먹고는 다시 앞장을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나 역시 피할 수는 없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때쯤 익숙해진 이름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는 기쁨도 있었다. 평생의 삶의 목적을 '사랑의 완성'에 두고 신에게 다가가기를 소망했던 톨스토이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친구의 딸과 결혼했다. 소피아는 18세였다.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성장했던 톨스토이에게 어린 신부는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런 소녀였다.
사랑의 완성은 그를 고뇌하게 했다. 확장된 사랑. 보편적 사랑.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결혼이란 현실은 갈등의 연속이었고 82세에 집을 가출해 쓸쓸히 죽어간 순간에는 결국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처로 만들고 말았다. 그는 그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억압된 사회통념 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을 그려냄으로써 성의 불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했고 그녀와 진정으로 모든 현실을 함께하고자 했다. 그가 낳은 13명의 자식은 그녀와의 끝없는 갈등 속에 나타나는 화해와 지속적인 노력인 것이었다. 톨스토이가 17살 차이의 친구 딸에 사랑을 느끼고 결혼했다는 사실과 안나 카레리나가 보여준 불륜, 그리고 러시아 귀족사회의 문화적 인식의 차이는 한국사회의 유교적 고정관념에 젖은 당시 20세의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란 틀이 있음을 알게 하는 자각의 시작이 되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가졌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면서 역사상 최고의 지성에 오르고 많은 것을 이룬 그에게도 현실은 결국 고뇌의 연속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얻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다.
아집. 고정관념. 자기합리화. 진정한 자유. 나의 사유의 시작은 이런 것들로 시작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온전히 나를 버릴 수 있는 나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미치도록 탐닉했다. 답을 구하고 구하려 할수록 나는 책속에서 필요한 변명만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벌써 25년이 지난 지금, 그때 탐독했던 책들과 내게 심어준 기억들은 가물거리지만 세월이 좋아 인터넷의 도움을 받으니 새삼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는 것이 새로운 즐거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색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탐닉과 사유, 사유와 번뇌, 번뇌와 자책, 자책과 회개, 회개와 확장, 보편과 질서, 한계와 직관, 우주와 인간, 아집과 겸손. 그렇게 나의 의식은 발전하고 있었다. 6년 동안 나의 미친 갈구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수 천 권의 독서를 경험케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쇼펜하우워의 '자살론', 바바 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알렉산더' '징기스칸' '니체' '데카르트' '칸트' '루소' '크리슈나무르티' '간디' '라마 크리슈나' '공자' '맹자' '중용' 데이몬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 번 벌로의 '매춘의 역사',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시그레이브의 '중국인이야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 내 기억 속에 이제는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희미해졌다. 단지 분명한 것은 26세의 나는 두꺼운 책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보편적 인식으로 의식의 흐름을 타고 하나의 나열을 가능하게 했다. 방대한 독서와 치열한 사유가 나에게 어떠한 분명한 답을 주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단지 주어진 문제를 나만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은 가질 수가 있었다.
보편성=일반성=우주=세계=존재의 방식=원리+변화+형상+무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이 신뢰라는 하나의 문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그 자신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신의 본성을 포기하지 않는-현실 속에 많은 자기 합리화와 변명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않는- 삶의 노력을 말하고 있다. 행동에 일치된 말이란 생각과 말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 또한, 생각이란 사색과 직관적 경험을 통하여 훈련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의 감정은 이러한 일련의 삶의 방식에 편협한 주관과 심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경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생각을 전부 나타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함에 있어 목적성을 갖게 되고 감정과 의도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지고 있었는가? 그리고 내가 내뱉은 말들은 얼마나 신중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였는가? 단지 나의 생각과 감정만을 너무도 쉽게 내뱉은 결과에 나는 정말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되새기고 후회하고 다짐했다. 처음에는 나의 사유의 문제가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귀속되어 결론을 내리려 하였다. 지난 과거의 순간순간을 되새겨 나의 행동과 그녀의 생각을 돌이켜 생각하였다.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니 어느 날 6년이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는 사실은 아니다. 세월을 낚는 강태공과 같았다면 이해가 될까? 그리움을 낚았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성 싶다.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에 띄우는 편지'는 그 제목만으로도 항상 나를 감흥하게 한다. 새로운 결심으로 현실에 다시 발을 딛고자 하였던 그해, 26살의 청년인 나는 오에 겐자부로처럼 말만 들어도 마음을 살랑이는 그러한 '그리운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자각의 세계. 그것은 나에게 많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욕정도 욕망도 버렸다. 그때는 그랬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나는 세상의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하산하는 도인이나 된 것처럼 이제는 세상을 알 듯 했다.
그 사이 친구들은 군대도 다녀왔고 대학을 졸업하여 새로운 진로를 찾고 있었다. 나를 아끼던 친구는 함께 유학을 가자고 권하기도 하였다. 걱정하는 아버지를 피해 대학 재수를 핑계로 은신했던 대학 7수의 서울생활을 접고 한참 전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학적만 두었던 음악공부를 다시 하기로 했다.
나의 결정을 아버지는 반가워 하셨다.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기다림은 아버지가 내게 베푼 크나큰 사랑이다. 오늘 나는 나의 아들을 그 만큼 사랑할 자신이 없다. 이 모든 사랑도 이미 18년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분을 그리워하며 이제 와 새삼 느끼게 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거칠 것 없었던 나의 방황. 그것은 아버지의 기다림과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내게 어떠한 압력이나 훈계를 하시지 않았다. 바램과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셨을 것이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아버지께 제안을 했다. 공부와 사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2억 원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선뜻 아버지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면 사업자금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당시 2억 원이면 지금 10억 원과 비교될 수 있는 상당한 금액이다.
당시 페스트푸드는 고향 제주에서 낯 선 사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지 2-3년에 불과하여 각 브랜드가 전국적인 유통망이 없어 대도시를 제외하면 지방에 매장 개설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1990년 당시 서울서 유행하던 페스트푸드는 장래 일반적인 식문화로 전국적인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시기적으로 선점을 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유명한 패스트푸드 회사의 한국 지사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시기가 이르다는 것과 지방에 진출하려면 시일이 좀 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브랜드는 대기업이 독점하여 직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시기가 되면 방법은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사회에 뛰어들고자 계획한 첫 번째 시도는 마음속에 남기고 다음 기회로 넘겼다.
다시 막연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무엇인가를 시작하여야 하는데'. 서울 중심가의 큰 대로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빌딩...임대업체...1층...2층...3층....업종...3년...----. 서울은 당시도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볼링장 간판이 들어왔다. 순간 머리 속에 모든 사업계획이 정리되었다. 노트를 챙기고 달려 들어갔다. 여러 업소를 찾아다니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레인당 설치비 3천 5백 만원.
수익 가능한 레인 8개 이상. 2억 8천 만원.
인테리어 1억 5천만원
임대보증금 5천만원.
소모품 2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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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계 5억원.
레인당 수익 월 300만원 8레인 월 2,400만원
부대수입 200만원 합계 2,600만원
인건비 기계실 3명 450만원, 카운터 3명 300만원 소계 750만원
기타유지비 500만원
이자 연 12% 월 5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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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2,200만원 순이익 월 400만원
볼링이 1986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고 난 후에 서울에는 우후죽순처럼 볼링장이 생겨나고 있었다. 제주는 오래된 볼링장과 새로운 볼링장 2곳이 성업 중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서울의 대형빌딩들은 2, 3 층에 자리 잡은 볼링장이 소음과 진동이 너무 커서 피해를 입는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여 쫓겨나가는 실정이었다. 1990년 당시에는 새 것이나 다름없는 중고 레인들이 새로운 장소를 찾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었다.
레인 설치업자와 함께 인천을 갔다. 그곳에 마침 1년 반 만에 폐업을 하고 상태가 양호한 레인이 있었다. 중고 레인은 설치비 운송비를 포함 하면 1,500만원이면 가능했다. 레인당 750만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구두계약을 하였다. 볼링장을 할 만한 건물도 찾았다. 인테리어의 형식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카페형 볼링장으로 컨셉을 잡았고 인테리어를 1억원에 가능하도록 설계를 하였다.
부대시설은 전문 커피점을 찾아 프랜차이즈 계약 여부를 타진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볼링장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들한 사업이 되었지만 커피전문점이 뜨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 아이템은 유효한 것 같다. 총 사업비는 5억원에서 3억원으로 대폭 줄었다. 최소수익은 월 6백만원으로 3년간 2억1천만원의 순이익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3년 후, 5억원에 영업권을 넘기면 2억원을 더하여 4억원의 순이익목표를 얻을 수 있었다. 일사천리였다. 한 달에 불과한 기간 동안 이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때 접촉했던 꽤 많은 사람들은 젊은 나의 일처리와 추진력을 칭찬하며 놀라워했다. 나 역시 스스로 이러한 능력이 내게 내재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나는 분명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기에 성공적인 사업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아버지는 나를 불러 앉히시고 의논을 하셨다. 내 사업계획은 완벽했고 아버지는 내 아들을 믿어왔던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그리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 땅에 주유소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있는데 아버지 생각에는 그것이 보다 안정된 사업인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땅을 팔아 내 사업에 투자해 달라고 주장했다. 세 사람이 공동명의로 오래 전 취득했던 땅이었다. 주유소를 동업한다는 것이 나는 달갑지가 않았다. 동업은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말씀드렸다.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단독으로 운영을 하면 내가 책임지고 경영하기를 바란다는 말씀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불안한 미래 때문에 무리한 사업을 강행하셨다. 평생 사업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결국, 3년이 지난 여름날 어렵게 주유소 문을 열었지만 엄청난 부채와 압박감으로 그해 11월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충년(充年)의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