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결론은 없다②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삶의 결론은 없다②


아내와의 연애시절은 그 자체로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 연인은 많은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아내가 나의 사람이 되어 질수록 아내는 비망록 안에 있는 나의 지난 사랑을 질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접어 한 사람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불안감으로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아내가 내게 '헤어지자'라는 말을 하면 나는 어김없이 아내의 방까지 쳐들어갔다. 나를 만나면 아내는 언제나 나의 말에 설득되었다. 그것은 이미 아내가 나를 향한 마음이 항상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


4년이란 연애기간 동안 아내는 '헤어지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기 자신의 표현을 남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던 아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대부분 아내의 투정어린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나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던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아내가 나를 결코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도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여 스스로가 낮아져 비참함을 느낄지라도 나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어 하는 아내의 투정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에 대한 믿음과 나 스스로의 믿음 때문이기도 하였다.


'부창부수'. 그랬다. 아내는 피아노를 치며 나는 노래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아내 역시 아내의 피아노레슨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항상 충분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아는 아내는 경제적인 준비 역시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아내를 참으로 좋아하셨다. 그리고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시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당시 1억2천만 원에 불과했던 상대방의 토지를 4억 원에 매입하시고, 믿었던 동업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 지어놓은 주유소 개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어렵게 주유소를 개업했다.


아버지는 정유사 지원금 6억 원, 개인부채 4억5천만 원이라는 아버지 인생에 처음으로 엄청난 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류 외상매입이 늘면서 총13억 원의 부채를 감당해야 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공무원을 하셨다. 개인사업의 구조를 잘 모르셨다. 아버지는 남몰래 엄청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주유소 인감과 통장, 어음까지 모두 나에게 맡기시고 주유소경영을 나에게 책임지게 하셨으니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한 학기 남은 학업을 잠시 쉬기로 하고 주유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8세의 나이에 주유소 사장이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아버지의 사랑이다. 재수를 한다며 6년 동안 아버지를 속였고 당시 대학생에 불과한 아들에게 아버지의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그 순간까지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자상하고 자애로우신 아버지. 사랑으로 충만했던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그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시고 서울에서의 회의를 주관하시다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날은 밤을 새워 주유소 숙직실에서 선잠을 자고 비몽사몽 하는 와중에 아침에 서울로 향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지도 못했다. 오후 2시경.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에게 급히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어머니와 나는 마지막 비행기를 급하게 알아보고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의 지인들에 의해 장례준비가 이미 끝나 있었다. 서울서 아버지가 속해 계셨던 단체의 협회장으로 하고 싶다는 임원들의 청을 뿌리치고 다음날 바로 첫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의 시신을 제주로 모셨다. 당시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런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하늘이 무너진 그 느낌은 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짐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모든 부채를 내가 감당하겠노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자식에게 부채를 물려줄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아버지는 그러시지를 못하고 그 부담감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나를 너무도 사랑한 아버지. 아버지는 너무도 젊은 59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공항의 화물터미널을 가득 메웠다. 아버지가 수천 번을 드나든 공항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화물칸에 실려 돌아오신다.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까지도 공항화물청사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쌓아놓은 지역의 명망은 정치인이나 권력가가 아니었음에도 진심어린 애도를 받을 만큼의 인생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 만큼 따듯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급히 들어오는 여동생의 시간에 맞춰 장례일정을 잡았다. 아직 나와 결혼을 하지 않은 아내는 내내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조의금은 1억 원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주유소의 부채를 감당하고 경영에 밑바탕이 되었다. 아내는 아버지의 1주기를 기다려 해를 넘기고 나와 결혼했다. 주유소의 매출은 6개월 만에 6억 원에서 25억 원 정도로 성장했다. 정유사로부터 25억 원의 자금을 회전시킬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의 부채를 갚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금액이었다.


'아버지!'

나는 당시 그렇게 아버지를 부르며 안타까움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과 부채를 해결하며 다시 눈물을 흘린다. 500만원, 천 만원, 이천만 원, 아버지의 부채는 쪼개진 적금통장과 예금통장에 수십 개의 신용대출로 이루어졌다. 매달 이자 일도 다르고 대부분의 적금대출이 만기가 전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소문난 귀한 아내로 유복한 생활을 하며 우리 3남매를 성장시켰다. 아버지는 스스로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우리 집은 남들의 생각과는 달리 부러워할 만큼의 부자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은 자산 13억 원, 부채 13억 원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부채를 일사천리로 해결해 나갔다. 당시 나의 은행잔고는 5억 원 이상의 평 잔이 있었다. 나는 사업에 재미를 붙여갔다.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젊은 사업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부채 25억, 자산 25억과 현금 5억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불과 1년도 안된 1995년 당시의 재무재표였다.


나는 인도의 전설적인 성인 '라마 크리슈나'를 현실에서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세계인으로부터 성자로 추앙받는 간디를 존경한다. 그녀와의 이별 후 나는 히말라야를 동경했다. 돌턴이 물리적으로 원자를 규명하기 훨씬 이전, 동굴 속에 박혀서 우주와 원자의 개념을 제시한 데모크리스토스처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라마승들처럼, 크리슈나를 꿈꾸며 평생을 수도에 정진하는 인도의 수도자처럼, 바바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처럼, 나는 수도의 길을 걷고 싶었다.


'현실 속에서 이상을 꿈꾸자'


나는 간디를 통해 전혀 같을 수 없는 현실을 동일시하며 이상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우리 부부는 유학을 가서 공부한다는 꿈을 접게 된다.


지나면 모든 것이 후회가 된다. 최초의 사업계획을 실행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아버지가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사랑이란 것은 그때 모든 의욕을 꺾어 버렸다. 현실을 딛고 서지 못했던 그 대가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주유소 경영은 어린 나에게 나이에 비해 너무도 많은 부채와 자산을 갑작스럽게 경험하게 하였고 사업이 안정된 업종인 만큼 오히려 스스로의 굴레가 되었다. 주유소 가치가 20억 원에 상응하여 경쟁 정유사들이 매입을 원했을 때 주유소를 처분하고 5억 원의 이익금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어야 했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바꾼 아버지의 유업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오류였다. 주유소 사업은 볼링장 사업의 시작과 함께 3년 후 영업권을 키워 넘기겠다는 그때의 현명했던 사업적 계산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꿈을 계획했어야 했다.


나의 결혼식은 꽤 성대했다. 아버지의 유고로 생기는 빈자리를 어머니는 걱정하셨다. 결례를 무릅쓰고 청첩장에 아버지 이름을 올리고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결혼식에 참석해 주기를 청했다. 그것은 아버지 명망에 대한 확신이었다. 또한, 아버지를 대신하겠다는 나의 사회적인 발걸음이기도 하였다.


나와 대학생활이 동기들과 6년이나 차이를 벌리고 있어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많은 친구들과의 오랜 만남도 있었다. 주유소 경영은 자리를 지키기만 하여도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30세의 나이에 주유소 사장이란 직함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내 친구들만도 백여 명이 넘는 하객이 있었으니 꽤나 성대한 결혼이었다. 친구들과의 피로연도 이틀에 걸쳐 하였다. 친구들 또한 많은 하객에 뒤섞여 예식을 하였던 교회 본당은 하객들로 가득 찰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부재에 의한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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