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고난은 정말 혹독하였다①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by 와와우

절망이 지나간 공허 속에 새롭게

피어난 것들


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去 然)


현실에 고난은 정말 혹독하였다①


1997년 한국의 IMF 외환위기를 1년 앞둔 1996년 말부터 국제적 경제 흐름에 가장 민감했던 정유사들은 구조조정을 가장 일찍 시작하였다. 소매시장에 풀렸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유사는 100일이었던 외상기간을 50일까지 서서히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한 달 매출이 5억 원에 달했으니 주유소 현금회전률이 6개월 사이에 9억 원 가까이 빠져나간 것이다. 나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보증을 부탁하고 금융권을 동원하여 3억 원 가량의 금융부채를 지기 시작했다. 피말리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약속을 위반한 정유사를 상대로 강하게 밀어부쳤어야 했다. 외상 채권을 23억 원에 고정하고 3억원의 준비자금과 5억원의 유동자금을 포함하여 합계 8억 원을 명의를 바꿔 끝까지 버텼어야 했다. 정유사가 근저당을 잡은 주유소의 감정가격이 15억 원에 불과했으니 그들은 쉽게 공급계약을 파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인정에 너무도 쉽게 상대에게 유리한 패를 넘겨주고 말았다. 거기에는 아버지의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지역 정유사의 전무로 대표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최초에 주유소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완강하게 버틸 수 있던 나의 의지를 당시 그는 당신을 믿으라며 결국 나의 손에서 모든 패를 가져가 버렸다.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주유소는 당시 영업이익을 충분히 내고 있었고, 향후 10년 이내에 부채 그 이상의 수익을 낼 수도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96-7년에는 경험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가 내게 다가온다. 일주일 주기로 다가오는 어음결제는 당장에 문제가 없었지만 3개월 동안 돌아오는 예상 금액은 3억 원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끌려가면 보증을 서준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통장에 있던 3억 원의 현금을 차명으로 빼돌리고 부도를 냈다.


한 순식간에 행복은 내게 있어 정말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돈에서 시작된 현실적인 압박은 그 상상을 초월했다. 부도를 내기 전 일 년의 시간은 내게 있어서 정말 지옥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과거 첫사랑의 실패를 가슴 아파 할 때도 숨을 쉴 여유는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그때의 경험이 상황이 조금도 같을 수 없는 당시의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도의 순간 나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인생에서 흥미로운 버라이어티한 게임을 제대로 경험한 것이라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하기 전 그의 부채가 1억 데나리우스(약 700억 원 추정)에 이른 빚쟁이였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려 하였다. 역사가들은 대마불사를 말할 때 카이사르에 비교한다. 대마불사를 성공시킨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도 철저한 계획에 의해 의도한 부채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주어진 상황이 그의 모험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널 때도 그는 확신을 갖고 건너지는 못했다.


남은 3억 원의 돈은 주변에서 보증을 선 모든 부채를 갚았다. 은행에 남은 부채는 신용대출로 빌린 2억 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97년의 IMF는 정말 가혹하게 나를 압박했다. 은행권의 부채는 제멋대로 고금리의 연체이자가 붙더니 불입되었던 적금이나 보험금은 채권추심이 이루어진 1년을 훨씬 지나서 이자부터 상계하고 채권추심회사로 넘어간 채무는 복리로 계산되어 5년이 지나서는 6억 이상의 채무가 되어 돌아왔다.


은행에는 별단예금 계정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을 죽는 날까지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계정이나 다름이 없다. 97년 이후는 추심 가능한 채권을 추심전문회사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최고장과 독촉장은 우편함에 계속 쌓이고 있었다. 주소를 바꾸어도 다시 시작되는 독촉은 이후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빌려준 돈에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슬람이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이러한 실질적인 위민정신이 불과 1세기만에 이슬람제국을 팽창하게 하는 이유가 된 것이다. 이렇듯 이슬람율법이 단순하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직설화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고조선부터 고리대업이 존재했다. 화폐에 준한 경제체제를 인류가 시작한 순간부터 가진 자는 고리대업을 하여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자는 이른바 기회비용을 산출한 것이다. 이러한 기회비용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적정한 기준을 잡기가 매우 어렵고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합의에 의하지 않은 이자는 결코 그 명분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을 죄악으로 바라보는 코란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에게 주어지는 부채를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적금으로 들어간 돈을 제외하면 1억 5천만 원 정도의 부채가 사실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고정된 원금을 10년을 분할 상환하는 제도가 있었으면 나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후 2004년부터 시행된 모든 부채를 탕감하는 파산신청으로 2007년에서야 부채의 부담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부채의 완전변제 방식으로 부채를 탕감해 주는 개인회생이나 파산신청 이전에 장기로 원금을 분할 상환하는 중간 과정을 제도적으로 구비되었다면 재기가 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도를 경험했던 아내는 담담했다. 그것은 아내가 대학원의 모든 과정을 마친 상태였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에 전임교수로 나가기로 약속된 상태였다. 부도가 나기 전 아내와 큰 다툼이 있었다. 아내가 나와의 이혼을 결심할 정도의 큰 싸움이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아버지가 그랬듯 아내나 어머니에겐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다. 부도를 피해 서울로 올라간 나는 아내에게 부도사실을 알렸다. 놀란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동안 있었던 나의 고민을 아내는 알게 되고 눈물을 흘렸다.


부도가 난 후 몇 개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그해 여름, 만삭인 아내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짧은 원피스를 입은 아내의 뒤태는 처녀 때나 다름이 없었다. 유난히 아름답고 늘씬한 다리를 가진 아내의 모습은 만삭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아내의 배만 볼록 나온 노란색 바탕의 꽃무늬 짧은 원피스는 어린 여자애가 임신한 듯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 아이를 가진 나만의 여자의 고혹적인 매력.... 아내가 내 머리 속 뇌리를 지금도 가득 채우고 있는 27살의 내 아들을 임신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돈도 바닥이 났다. 통장에는 불과 100만원도 없다. 아내는 출산을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달래주며 안심시켰다. 아내는 자신의 통장을 보여준다. 그동안 생활비는 아내가 알아서 해결해왔다. 오랫동안 안식처가 되어준 내 집에서 살 수 있는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출산이 임박해서 아내의 진통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밤을 새도록 진통을 한다.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가 거꾸로 섰다는 의사의 말에 마지막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수술을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아들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신기했다. 나의 아들! 아내를 너무도 닮은 내 아들. 아내는 진심으로 아이가 나를 닮기 원했다. 그러나 아들의 긴 속눈썹과 커다란 눈망울은 아내를 닮아 빛나고 있었다.


아내는 아들을 너무 사랑했다. 그러나 아내는 한 아이의 엄마라는 책임과 현실적인 망막한 현실로 인해 산후우울증이 생겼다. 당시 나는 항상 옆에 있었음에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내 자신이 그렇게 둔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아내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구러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천재성이 있는 아내의 산후우울증. 나는 아내가 겪었을 정신적 고통과 갈등을 알았어야 했다. 결국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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