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 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아내의 죽음의 순간에도 나는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중환자실의 아내는 계속해서 의식불명상태였다. 보호자실에 있던 나는 위독하다는 전언에 급히 들어갔다. 주사기를 아내의 가슴에 찌르며 전기충격기를 수차례 들이대고는 "사망했습니다."라는 말이 전부였다. 나는 아내에게 편안히 가라는 인사도 못했다. 100여일 동안 낮선 병실에서 살기위한 투쟁을 함께 하였는데 결국 자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는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수차례의 죽을 고비들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분명 회복의 기미들이 확연하여 닥쳐올 아내의 현실적인 재활과 그로 인한 아내의 낙담을 걱정하며 준비했다. 허무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이제는 아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영혼이 없는 아내를 울부짖는 처가식구들에게 남기고 말없이 중환자실을 나와 병실 계단에 혼자섰다. '아내가 죽었다' '이럴 수는 없다. 나의 인생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인생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나는 비명을 질렀다. 목을 놓아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아무라도 잡고 원망하고 싶었다. 원망은 분노가 되기도 하였다. 아내가 너무도 불쌍했다. 아내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의료사고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항변을 할 수 있는 의욕이 없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아내가 대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아내는 나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간 것이다. 아내가 남겨놓은 아들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야 했다. 아내의 재능을 사랑했고 그 순간까지 나와 함께 아내의 곁을 하루도 비우지 않고 밤낮을 간호하고 기도했던 처고모의 정성에도 이제는 감사한다. 처고모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학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뜻. 아내는 상처로 얼룩진 한 남자를 온전히 받아주고 사랑하였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아내의 고뇌로 얼룩질 수 있는 인생에 평안을 준 것이고 나에게는 그래도 살아보라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숙제를 준 것이다.
한참을 지나 병실복도로 나왔다. 급하게 달려온 친구 어머니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았다. 부둥켜안고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서러움에 겨워 목 놓아 울었다. 진정하고 나니 곁에 있는 전혀 모르는 의사를 소개했다. 삼성의료원 원장님의 아들이라 한다. 이 병원 정형외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운명인 것인가!’ 미리 만날 수 있었다면 아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내가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움으로 몸서리치게 하였다.
영안실에 죽은 아내의 모습은 영혼이 없다. 아내의 목에 호흡기를 대었던 깊은 상처가 남았다. 장인은 아내의 벗은 몸을 보지 못하게 한다. 처가식구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나는 남이 된 듯 가까이 다가설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나를 외면했다. 그리고 나를 원망했다. 서울에 있던 친구들이 나를 찾았다. 당시 나는 많은 처가식구들의 싸늘한 시선에 잔뜩 주눅이 들어 슬픔을 혼자 삼키고 있어야만 했다. 하나 둘 모인 친구가 십여 명이 되었다. 그때의 친구들의 면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위로는 진정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밤을 새워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듯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시 제주공항의 화물터미널에서 아내를 인계받았다.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5개월이 안된 아들이 잠자고 있었다. 아내의 잠버릇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반대쪽 다리를 포개어 올려놓은 모습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자고 있는 아들에게서 아내의 마지막 인사를 받고 있다. 자고 있는 아들을 끌어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린다. 한참을 운다. 아들은 편안한 얼굴로 계속해서 자고 있다. 나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된 것이다.
모든 교인의 슬픔 속에 모든 장례절차를 마쳤다. 많은 사람들이 아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아내의 나이는 27살이었다. 이제 15년이 흘렀다. 아내의 잔상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아들과 어머니 그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정도로 삶의 무게는 지금도 나를 짓누른다. 아내는 하늘에서 모든 시름을 놓고 평안을 찾았을 것이다.
한 동안 나는 커가는 아들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덜컹 가슴이 내려앉곤 하였다. 아들은 아내의 습관을 흉내 내고 있었고 아내의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나는 아내가 아들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중학생이 된 아들의 모습에서 아내를 볼 수 없다.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서운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의 가슴에는 안타까움과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에 그리움이 더욱 쌓였다. 오히려 요즘 들어 부쩍 아내의 살아있는 듯한 꿈을 자주 꾼다.
17년을 함께한 부부의 모습처럼 아내는 젊은 모습으로 성숙한 말들과 표정을 하고 있다. 아내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도 겸비했었다. 사랑을 알고 측은지심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게는 참으로 과분했던 사람이었고 나는 아내의 가치와 소중함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나의 오만은 아내를 가르치려 했고, 아내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지 못했다. 없어서 생기는 그런 종류의 아쉬움을 넘어서 나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후회와 그리움으로 남았다.
남은 것은 어머니와 아들, 빚쟁이들의 빗발치는 독촉이었다. 어머니는 살 수가 없다시며 미국에 있는 여동생에게로 갔다. 빚 독촉도 이제는 이력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생 이름의 땅과 남은 돈으로 모든 개인부채를 갚았기에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빚 독촉은 없어 마음의 부담은 줄일 수 있었다. 아들과 둘만 남겨진 나는 언제 넘어갈지 모를 큰 집에 임시로 기거하였다.
나의 수중에는 만 원의 돈도 없었다. 아들의 분유 값조차도 없었다. 아내가 남기고 간 아들의 분유와 일회용 기저귀도 떨어져간다. 아들의 돐이다. 돐사진을 찍을 여유도 없었다. 두 친구가 알고 찾아왔다. 부조금을 주고 간다. 8만원이다. 그 돈으로 아들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모든 궁핍함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실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고소고발이 수십 건. 내가 고소한 사건만도 여러 건이 되었다. 친구들에게 빌려준 몇 백의 돈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목돈은 푼돈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도 그것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빌려준 5억 원이 넘는 돈은 전부 공중에 떠 버렸다. 지금도 나는 그 돈이 있어 주유소의 상황이 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돈 역시 부도와 함께 날아가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에 대한 채무의 책임과 그들에 대한 배품은 남아 있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 돈은 결국 내 돈이 아니다. 외숙모가 어렵게 전화가 왔다. 외삼촌이 일찍 돌아가셔서 보험설계사를 하시던 외숙모는 나에게 2억 원에 가까운 보증을 하셨다. 내가 갚았던 부채 중 5백여 만 원 정도의 잔액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1년 넘게 연체이자가 붙어서 돌아왔다. 외숙모는 혼자 그때까지 고민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아내의 보험금이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부부는 약정금액이 수억 원이 되는 보험이 있었다. 아내의 사고가 있기 보름 전 달마다 부어오던 보험을 모두 해약했다. 아내는 그 보험적금만은 놔두고 싶다고 했다. 달마다 넣은 원금은 400만 원, 보험금은 700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 돈으로 숙모의 빚을 갚았다. 보험금이 나오기까지 외숙모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그 친구들과 나는 5백만 원이란 돈이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다. 그동안 필요하면 빌려주고 돌려받은 돈의 단위는 수천 만원 단위였다. 나를 위로해 준다고 많은 친구들 앞에서 비싼 술을 사며 호기를 부리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나에게 돈을 빌려주는 친구는 없었다. 나는 그래도 그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 순간순간이 당황스러웠던 나에게 그들은 술을 사며 나를 위로해 주고자 애를 썼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은 친구가 나에게 돈을 빌려줬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친구. '세상을 살며 베풀고자 할 때, 또한 그러한 배품은 나를 위한 것이고 영원히 가져가야할 나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에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친구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라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나의 아픔을 하소연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항상 어떠한 답을 갖고 자신의 처한 상황을 담담히 얘기하는 나를 친구들은 오히려 재수 없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한 나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고 존중해주는 한 명의 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많은 고통을 견디며 생긴 나의 모습이 이미 그런 특별한 사람을 만들어버렸다. 친구들에게서 느낀 그 순간의 배신감 또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