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며 고개를 끄떡이고,모든 지남과 지나는 것에 그러려니 한다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칭송받는 이가 있다. 그리스 민주정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페리클레스(BC 495~429)'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와 문필가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페리클레스는 낡은 족벌정치에 대항하여 투표라는 정치방식을 이용할 수 있었던 첫 시대의 인물이다. 민주정치를 통한 아테네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의 성공은 출중한 지혜와 청렴함에 근거를 둔 명망에 힘입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재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공직수행 외에는 다른 어떤 길로도 나서지 않았으며 한 가지 사회적 목적만을 추구하다가 인생을 마친 인물이었다. 2,500년 전 귀족적 족벌정치로부터 민주정치를 실현시킨 그 험난한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현대의 민주정치가 가야할 본질적인 방향은 그 본질에 충실함에 있을 것이다. 그 본질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다. 그것은 지도자의 희생과 봉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일반화된 이념인 민주정치의 본질이 그 시대에 비하여 발전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복잡한 권력구조만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도 존재한다. 그리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로 대변되는 전제정치의 도전을 받고, 로마에 이어진 민주공화정은 페르시아와 로마의 세계주의의 핵심의 되는 다양성이란 정신을 낳았다. 권력은 민중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거쳐 사라져버린 이러한 정신은 현대사회에 그 본질을 바탕으로 부활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독립된 역사를 갖고 있는 동양의 역사 역시 민중이란 것은 중요한 정치적 명분을 갖는다. 알렉산더, 카이사르, 징기스칸, 나폴레옹 등 위대한 정복자들의 역사 속에서도 민중이란 명분은 포기될 수 없었다. 민중과 다양성은 양립하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인간은 그렇게 존재하였는지도 모른다.
"세옹지마" "전화위복". 세삼 이러한 고사성어가 나의 뇌리를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을 만큼 나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세옹지마"는 중국 전한시대(B.C.2세기경) 학자인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온 말이다. 옛날에 중국 북쪽 변방에 사는 노인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낙심하였는데, 얼마 뒤에 그 말이 한 필의 준마를 데리고 와서 노인이 좋아하였다. 이후 그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어 다시 낙담하지만, 그 일 때문에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목숨을 구하게 되어 노인이 다시 기뻐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인생의 변화무쌍함이 예측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인생의 다양한 시련과 성공의 환희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적극적인 사고와 의지를 요구받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얘기한다. 끝없이 인생이 추락하더라도 바닥은 있는 것이고, 그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서는 희망을 바라본다는 것은 낙심한 인간에게 위로가 된다. 하지만 냉정한 현실은 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이에게만 일말의 기회를 준다. 그것도 반복되는 기대에 대한 낙담과 극복을 요구하는, 감상이 아닌 적극적인 실천의 희망인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거침없이 추락하는 인생의 끝자락만을 잡고 정신이 혼미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는 온갖 망상과 절망에 휩싸여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절망의 이유가 객관적이지 못한 경우 인간은 더욱더 비참함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감정의 함정은 인생을 걸어가는 고비 고비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이다.
"반복되는 절망감을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것".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맑게 그리고 그 무엇을 향한 순수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을 신이라 하여도 좋다. 또는 우주라고 하여도 좋다. 그것을 구지 인간이 규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 무엇을 알 것 같아도 삶을 살아가는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것도 죄악일 수 있는 것이다. 인생 그 자체가 누구에게나 순간순간들이 고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만을 전하고 나머지 선택은 상대에게 맡기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갈등은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과 명예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소수 인간의 탐욕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종교적 선각자들은 인간의 통합과 화해의 방법으로 신의 존재와 교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종교집단은 무리를 통한 아집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한다. 인간의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의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의 분명한 진리인 것이다.
돈에 대한 궁핍함만큼 절박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어느 날 나보다 절박했던 친구가 전화가 왔다. 학교 가는 아들의 버스비를 주지도 못했을 만큼의 절박한 빈털터리 상황에서 그 친구는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의 궁핍한 설명에도 그 친구는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절박했다. 나의 도움이 없으면 세상을 등질 듯 절박해 보였다. 나는 도울 수가 없었다. 백만원만 보내주면 그만이었다. 그가 그 순간을 이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만한 돈은 지금 나에게도 절박한 금액이었지만 내게 그러한 돈이 있었으면 과연 보내주었을까?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은 순간순간 필요한 돈에 노예가 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사람을 대하며 한 때를 보낸 경험도 있다. 전에는 내가 필요하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직장을 구했다면 지금보다 편한 생활을 할 수는 있었다. 나의 인맥과 경영능력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사업자의 대리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월급생활이란 것이 어떠한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