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날의 숨이 되어주고…
삶의 이유가 되어주는 아내와 함께 낯선 땅 인도네시아에서 삶이 18년째 이어지고 있다.
뚜렷한 취미가 없는 우리 부부가 함께하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인도네시아 땅을 작은 두 발로 담아보는 것이다.
아내와 약속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세상 끝은 못 가더라도,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끝은 밟아 보자.”
그런데 이제 이 여행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두려움이 생겨 슬며시 피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이 여행의 시작과 발단은 며칠 전부터였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책 읽기를 즐겨하는 아내가 식탁으로 나를 부른다.
언제부터인지 아내가 이유없이 부를 때마다 괜스레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
어색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아내가 갑자기 바다 이야기를 지나가듯 꺼내기 시작한다. 못 들은 척 외면해 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눈빛이 나를 압박하며 끼니때마다 식탁에 밥그릇 놓는 소리를 조금씩 키우며 나의 반응을 체크한다.
더 이상 피할 구멍을 찾지 못한 나는 깊은 들숨을 조금씩 내뱉으며 구글 지도에서 찾은 바다 PANTAI MADASARI PANGANDARAN(빵안다란 마다사리 해변)을 아내에게 보여준다.
흡족한 아내의 표정과는 달리 나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와우 !!!!
집(Bandung)에서 무려 7시간 정도 걸리는 여행이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좁은 산길과 파인 도로를 군사작전 치르듯이 운전을 한다.
3시간쯤 운전을 하다보니 결려오는 어깨와 고생한 다리를 달래고, 지친 육신에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잠시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인니 시골에서 만나는 식당은 대부분 흙바닥에 의자 몇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파리만이 사람들을 반길 뿐이다.
음식이라고는 바나나 잎에 싸인 Bakar Ketan(구운 찹쌀떡)과 Gorengan(튀긴 음식) 몇 개 그리고 인도네시아 컵 라면이 전부이다.
감사한 것은 아내가 인도네시아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주문한 컵 라면과 Bakar ketan을 먹고, 의자에 앉아 인도네시아 커피를 마시며 짧은 휴식을 가져본다.
이제 가야 한다. 곧 날이 어두워 질 것이다.
지친 몸을 애써 다독이며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예약한 호텔(Bobo cabin madasari)에 여장을 풀고 풀린 눈과 허물어져 가는 다리를 애써 달랠 시간도 없이 아내와 난 허기진 배를 채우러 다시 힘을 내어 식당을 찾아간다.
감사하게도
외진 시골(kampung)이었지만 바닷가인 탓인지 문을 연 식당이 있다.
OCEN VIEW라는 이름을 가진 해변가 식당이다.
바다 내음과 비린내가 흠뻑 베인 식당에 앉으니 까무잡잡 하지만 선한 얼굴을 하신 아주머니와 손에 칼을 쥔 주인아저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런 시골 식당에서는 메뉴판이 따로 없다. 주로 그날 그날 잡힌 당일 생선을 요리해 파는 식당이다.
오늘 준비된 바다 생선은Kakap Putih인데 우리나라“흰 도미”에 해당하는 생선이다.
그리고 뜻밖에 이 식당에서는 내가 좋아하는Nasi Liwet이 메뉴에 있다. Nasi Liwet은 우리나라에 돌솥밥에 해당하는 인도네시아 솥밥인데 일반 물로 짓는 것이 아니라Kelapa(코코넛) 물로 밥을 짓고 소금과 월계수 잎이나 레몬 그라시를 넣는다.
어떤 식당에서는 작은 멸치를 넣기도 한다(식당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Nasi Liwet은 고소하고 짭짤한 밥맛이 일품이다.Nasi Liwet과Kakap Putih(흰 도미)그리고 Kangkung(공심채)를 주문하자 아주머니가 접시 대신 큰 바나나 잎으로 식탁을 장식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온 kelapa muda(코코넛)를 마시며 허기진 배를 채운다. 10여분이 흐른 뒤 드디어 바나나 잎에 음식들이 놓여지며 숯불에 잘 구운 Kakap putih 가 등장을 한다.
짙은 숯 향이 베인kakap putih의 먹음직스러움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인다.
무엇보다 긴 내 얼굴보다 더 큰 생선의 크기가 압도적이다.
얼마나 잤을까?
객실 통창 옆에 놓인 침대로 햇살이 들여지지 않고 옅은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니 아직 새벽녘인가 보다
그런데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마주하고 통창을 통해 바다를 보고 있는 아내의 예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한쪽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낯선 이국 땅에 남편이라는 모지리 한 사람만 바라보고 18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친구도 없이 몇 날 며칠일을 남편 없는 집을 지키며 집안에만 갇혀 살기도 하고, 어떤 날엔 풍토병에 걸려 바닥을 기면서도 끝까지 견뎌준 고마운 사람이다.
머쓱한 감정에 천장을 쳐다보니 밤새 비가 내린 것 같다.
창(window)으로 된 지붕 한 쪽에 그림자가 생긴 것이 나뭇잎이 떨어진 모양이다.
감사한 것은 새벽녘의 아잔 소리가(무슬림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로 무슬림은 하루에 5번씩 기도를 한다.) 나를 깨운 것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 소리가 잠을 깨우고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에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함을 느낀다.
호텔 방 통창으로 보이는 파도와 구름에 가려진 새벽녘 햇살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로 하여금 한동안 멍하니 통창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참 오랜만에 귀가 살아 있고 마음이 열려 있음을 느낀다.
한참 동안 바라보던 통창 너머의 세계를 이제는 발로 딛고 피부로 느끼기 위해 아내와 함께 호텔 방을 나선다 (음 ~~ 호텔이라기보다는 cabin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침대 베드가 넓고 깨끗해서 좋았고, 좁은 듯하지만 샤워하기에는 충분한 깨끗한 화장실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넓고 시원한 통창을 통해 바라보는 오션뷰가 너무나 좋은 호텔이다.)
아내의 손을 가볍게 잡아본다.
간만에 만져보는 아내의 작은 손이다. 늘 보는 아내의 손이 뭐 그리 특별할 것이 있나 싶지만, 여행지에서 잡아보는 아내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내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거려 준다.
이 작은 손이 낯선 인도네시아 땅에서 나로 하여금 버티게 해준 손이다.
아내의 손을 잡고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녘 해변가에 흔적을 남기며 바닷바람을 맞는다.
그 어느 때보다 감성적인 아침을 보내고 늦은 아침을 먹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
그리 운동 신경이 좋지 못한 아내가 집에서부터 서핑(Surfing)을 배우고 싶다고 수영복을 챙겨 온 것이다.
올해 나이 60이다!
누군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거짓말이다. 60이라는 숫자는 운동 신경을 둔하게 하여 누가 부르면 돌아보는 속도가 청년들보다 최소 ㅇ. 5초는 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서핑(Surfing)을 배우고 싶단다.
비겁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용단이다."Pantai Batu Karas"해변이다.
Pantai Batu karas(빤따이 바뚜 까라스 해변)에 도착을 하니 비가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한다.
아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홀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가서 서핑을 가르치는 강사를 붙잡고 흥정부터 시작한다.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지는 강의와 실습에 400,000Rp(원화 3만 5천 원 정도) 정가를 100,000Rp를 깎아서 300,000Rp(2만 5천 원)를 준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아내가 흥정을 하여 거의 반값으로 살고 있다.
저승 사자를 만나도 사정에 따라 가는 날짜를 흥정할 사람이다.
드디어 시작이다.
모래바닥에 누웠다가 일어서고를 반복하지만, 생각보다 예쁜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한참 동안 가르치던 강사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당황스러움은 나로 하여금 강의 현장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한다.
이제 바다로 나갈 시간이다.
강사의 가르침이 탁월하여 바다로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가르침의 한계를 넘어 할 수 없이 바다로 나가는 것인지 그 속내는 알 수가 없다.
바다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탓인지 파도가 생각보다 높았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은 개구쟁이 소년처럼 기대와 흥분에 조금 상기된 얼굴이다.
오랜만에 보는 활기있는 모습이다.
아내의 이런 살아있는 얼굴은 실수한 나를 쥐잡듯이 잡을 때나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다.
바다에 들어선 아내가 보드를(Board) 끌고 파도를 타기 위해 나아가 보지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파도에 밀려 허둥대는 모습에 걱정이 파도보다 더 높게 밀려온다.
어느새 아내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먼바다로 나아갔고 그런 아내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나 역시 바다로 들어갔지만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먼발치에서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어라!!!
이게 웬일이래!
두세 번의 실패 이후 아내가 보드(Board) 위에 서서 짧게나마 파도를 타는 것이다.
급히 바다에서 나와 해변가에서 얼음찜질을 하며 치료를 받는 아내의 얼굴이 생각보다 많이 부어 있었다.
걱정과 염려속에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다 본다. .
“여보! 호텔에 가자!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
그러자 이 아주머니께서 느닷없이 한국인의 근성을 보여 주신다
“아냐! 시간이 남았잖아 !
이 아주머니는 시간이 남았다며 다시보드(Board)를 들고 바닷가로 나가신다. 참 놀라운 한국 아주머니다.
기어코 계약된 시간을 다 보내고서야 물속에서 나오는 아내를 보며 내가 이 여자와 살아온 인생이 참으로 기특했다.
그리고 아내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나이와 상황으로 인해 미리 한계를 그어놓고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반면에 아내는 도전을 통해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경험과 세계로 나아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가 되었다.
인생은 이처럼 파도와 같다. 겁쟁이는 파도 앞에서 주저앉고, 용감한 자만이 짧은 순간이라도 그 위에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