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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Sep 26. 2021

잘 가라 프라이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저만치 낯익은 프라이드가 달려온다. 운전석에 반가운 사람,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안경을 쓰고 어중간한 길이의 머리카락은 반쯤 뒤로 묶어 가닥가닥 흘러내린 퉁퉁한 얼굴의 그녀는 손을 흔드는 대신 창문 밖으로 주먹을 내민다. 순간 쿡 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녀의 주먹질. 

며칠 전 밤 9시,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 역 부근 카페를 바삐 가다가 포장마차에서 남편과 술을 마시고 있는 미란언니를 만났다. 뭐가 좋은지 불그스레한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다. 술을 마실라 하면 등 돌리고 마실 일이지 누가 지나가는지 출석을 부르는 듯 길을 내다보고 앉은 상황이었다. 얼굴은 시커먼데 속눈썹이 길고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아저씨가 옆에 있어서 모르는 척 하려 했더니 미란언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부른다. 술 한잔 하란다. 같이 웃어주며 “나, 커피 마시러 가요”했더니, “그 나쁜 년들 아직도 만나냐. 뒤에서 니 욕 하고 다니는 년들, 뭐하러 만나!” 걱정을 해 주는 건지, 빈정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다. “딴 사람 만나러 가요” 미란 언니는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까딱하며 “현수 엄마가 너 가만 안 둔단다” 내가 활짝 웃으며 “왜요?  현수 정학당했다면서요?” “어떤 년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녀? 그년 누구야?” 술이 한잔 들어가니 년이 거침없이 나온다. 황소 눈을 한 아저씨는 싱글싱글 그냥 웃고 있다. ‘아저씨 좀 말려주세요!’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그년 누구냐고?” “왜요? 다 알던데요.” “정학을 당한 게 아니고, 경찰서 가서 대화 잘하고 마무리했대. 며칠 반성문 쓰고 끝났대.” 속으로 쿡 웃음이 난다. 술에 취한 건지, 술 취한 척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현수가 정학당했다는 소문을 바로 잡으려는지 아는 대로 술술 말을 한다. 경찰서 가서 화해했다는 말은 미란 언니를 통해 처음 들었다. “현수 엄마가 너 벼르고 있어, 조심해” “내가 뭘요, 소식 듣고 궁금해서 언니한테 물어봤잖아요?” “그니까, 그 말한 년이 누구냐고? 어떤 년이 남의 말이라고 신나게 떠드냐고!” “아이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예요.” 나는 더 생글생글 웃으며 “공짜로는 안 되고, 맛있는 거 사주면 다 이야기해 줄게요. 다음에 봐요. 나 빨리 가야 해요” 씩씩대는 미란 언니 옆에서 얼굴도 팔뚝도 시커먼 아저씨는 말없이 웃고 있다. 미란 언니에겐 지 아저씨에겐 지 모르게 고개를 꾸벅하고 자리를 떴다. 

사건은 그랬다. 현수가 정섭이를 약 올렸단다. 현수가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라 껄렁껄렁 뱉은 말 한마디에 정섭이가 열을 받아 문을 부숴버렸다. 교실 앞 문짝이 망가지고 정섭이 손이 붓고 상처가 났다. 윤수가 정섭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호리호리한 정섭이를 뒤에서 꽉 끌어안은 틈을 타 현수가 피했고 애꿎은 문짝만 두들겨 맞았다. 문짝 윗부분 강화유리도 깨졌는데 와르르 쏟아져서 정섭이 손도 안 다치고 그냥 잘 쓸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이걸 지켜본 반 아이들은 공포심에 떨었단다. 문짝이야 정섭이 엄마가 물어주면 되는 거다. 맘 같아서는 대신 물어주고 싶지만 나설 자리가 아니니 가만있어야 한다. 

누구 잘못인가. 사건의 원인제공을 한 현수. 순간의 빈정거림을 넘기지 못한 정섭. 잘잘못을 따지자면 끝은 없다. 둘 다 잘 못한 게 맞으니. 초범인 현수야 '다시는 친구를 놀리지 않겠다'라고 반성문 몇 번 쓰면 된다, 문제는 서너 차례 작은 사건들이 있었던 정섭이. ‘화를 참겠습니다, 물건 파손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반성문 쓰고 끝낼 일이 아니었던 거다. 이번에 혹시라도 현수가 문짝 대신 두들겨 맞았다면, 둘이 몸싸움을 거창하게 했다면 누군가가 다쳤을 일인데, 문제는 그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 거다. 그냥 둘이 사과하고 끝낼 일이 아니었던 거다. 

딸 엄마들은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팔짱들을 끼고 보고, 아들 엄마들은 혹시나 정섭이가 또 사건을 일으켜 내 아들이 피해를 볼까 봐 대책을 세워 달라고 조용히 학교에 민원을 넣었다. 껄렁껄렁하게 말을 하는, 싱겁게 말을 툭툭 던지는 아들들을 가진 엄마들은 혹시라도 뭔 일이 생길까 봐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정섭이를 상담이라도 받게 해야 하지 않냐고 엄마 대표를 만들어 선생님을 찾았다. 

현수 엄마는 그냥 사과하고 끝내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하지만 조용히 움직인 엄마들 탓으로 현수와 정섭이는 며칠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성문을 쓰고 또 쓰고 또 썼다. 

현수 엄마는 누군가가 현수 이야기만 하며 발끈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신나서 미란 언니한테 전한 것을, 미란 언니가 “어떤 년이 입이 둥둥 떠서 이야기하고 다닌 다더라”해서 성질이 난 게다. 

나는 '현수 언니가 다잡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란 언니구먼' 하려다 참았다. 지하철역,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갔다 하는데, 포장이 반쯤 걷힌 자리에서 사람들을 향해 현수가 어떻고 현수 엄마가 어떻고 경찰서가 어떻고 술 한 잔 해서 방글거리는 얼굴로 한참을 목청 높여 이야기 한 사람은 미란 언닌 거다. 지하철역 입구 포장마차에서 온 동네 사람들 다 들으라고 소문내는 사람이 평상시 현수 편들어 주는 미란 언니인 거다. 

내가 확성기 들고 외치고 싶었다. ‘동네 사람들 이리 와 보세요. 술 한 잔 맛있게 걸친 미란 언니가 현수 사건 소문내고 있어요!’라고 말이다.

그 일이 있고 길에서 만난 현수 엄마. 집 방향이 달라 태워 줄 일도 없지만 속이 상하면 못 본 척 지나가면 될 것을, 주먹은 또 뭔가. 내가 현수가 잘못했다고 소문낸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엄마들 이야기하는데 듣고 현수 엄마와 가까운 미란 언니에게 물어본 것인데. 그 소문을 낸 사람을 불라고 다그치는 미란 언니와 현수 엄마.

주먹을 내민 프라이드는 천천히 잘도 굴러간다. 멀어져 가는 프라이드를 향해 내가 가운데 손가락을 펴고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백미러로 보이질 않길 바라면서. 잘 가라 프라이드.


*작가의 말: 일상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에 살짝 양념을 보태서 적어보았습니다.  사실 그대로 쓰기에는 마음이 쓰라린 구석이 있거든요. 마음이 울퉁불퉁한 사람들은 둥글게 깎으려 하지 않고 울퉁불퉁에 막힌 면들만 보려 하더라구요. 저는 글을 쓰고 나면 세모난 마음이 둥글둥글해지는 걸 느낍니다. 제 마음이 동글동글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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