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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Oct 26. 2021

커피 한 잔

커피 한 잔 할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피부터 내려요. 향 한 번 맡고 천천히 음미하며 커피 한 잔을 마셔야 하루가 가뿐하거든요. 미정씨도 그렇게 마셔봐요. 커피 맛이 달라요.”

등살이 퉁퉁한 단발머리 선희는 운전대를 부드럽게 돌리며 우아하게 말합니다. 뒷좌석에 나와 나란히 앉은 복순 할머니가 “아이고, 아침에 애 둘 밥 주고 아픈 엄마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바쁜지 아세요. 언제 커피 내리고 있대요. 밥 먹을 시간도 없을걸요”라며 선희의 말을 끊습니다. 나는 그만하라고 복순 할머니의 팔을 살짝 찌릅니다.

 “저도 원두커피 좋아해요. 주말에는 한 번씩 내려 마셔요.”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얼른 선희 편을 들어줍니다.

 나와 선희는 복지관에서 시니어 독서모임을 챙겨주는 자원봉사자로 만났습니다. ‘어르신들 독서모임 차량지원자’가 우리의 공식 명칭입니다. 차량지원자는 내가 먼저 했습니다. 사회복지사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복지관에 갔다가 무릎 수술한 할머니 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오늘만이겠지 했는데, 그게 일주일 스케줄에 떡 하니 자리 잡은 것입니다. 오랜만에 독서모임에 참여한 할머니가 너무 고마워하시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다음 주에 만나요” 해버린 것이지요. 그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할머니의 다리가 좋아지고 걸을 수 있게 되어서는 겨울에 빙판이 되다 보니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도 차만 얻어 타시지는 않습니다. 딸이 사준 립스틱을 나이 먹어 안 바른다고 꺼내 주시고, 손녀가 사준 갈비탕이 많아서 다 못 먹는다고 내주십니다. 나도 할머니의 마음이 고마워서 정이 들다 보니 큰 이모라 생각하고 계속 챙기게 되었습니다.

‘택시 타면 되잖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할머니들은 택시 타기가 쉽지 않습니다. 택시가 다니는 큰길까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어렵거든요.

 선희는 사회복지사 중학교 동창을 만나러 왔다가 가는 방향이 같은 할머니를 모셔다 드렸는데, 할머니의 고맙다는 따뜻한 악수 때문에 “다음 주에 저 시간 돼요.”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선희를 처음 만났을 때, “교육학 박사과정 하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아요. 결혼은 늦게 해서 아직 아이가 없고, 남편은 출장이 잦아서 집에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아요.”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나보다 몸집이 크고 강사 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 뭔가를 많이 알고 있어서 언니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언니가 없는 나는 동갑이지만 선희를 언니처럼 생각하고 뭐든 물어보고 든든하게 생각했지요.  

 할머니들은 독서모임이 끝나면 이 책 읽어봤냐고 물어봅니다. 고전문학이 큰 글씨책으로 나오다보니 주로 고전문학을 읽습니다. 작은 책은 돋보기를 써도 잘 안 보인다고 그럽니다.

 할머니들은 독서모임이 끝나면 싸 온 간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간식에는 차량지원자인 우리의 몫도 있습니다. 책 읽어 교양이 넘치는 할머니들 같지만, 고집불통 할머니들도 있어 우리는 가끔씩 중재도 합니다. 선희는 ‘역지사지’를 외치면서, 말다툼을 하는 할머니 두 분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돕니다. 할머니들은 선희따라 강강수월레를 하다가 웃고 말지요. 할머니들은 그래도 뭔가가 풀리지 않으면 “박사님 내 말 좀 들어봐요”하며 선희 옆으로 다가갑니다.

 그런 선희가 무릎 수술로 이번 모임에 나오지 못한 태림이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서, 아침이면 애들 챙기고 수술한 친정엄마 챙기다가 정작 내 밥은 거르는 내 앞에서 모닝커피를 운운한 것입니다. 그것도 수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고 드리퍼 끼우고 천천히 내리는 드립 커피를 말입니다. 아침이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드립 커피를 마셔야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속으로 ‘네가 교육학 박사가 맞냐!’라고 나직히 뱉습니다. 한마디 더 보탭니다. ‘아침에 밥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우아하게 커피 한 잔하고 있는 거겠지. 너도 아이가 생겨 봐라, 커피를 언제 갈고 있어’라고 말입니다.

 태림 할머니에게 갈 때도, 저는 떡 사고 복숭아 사고 뭔가를 손에 들었습니다. 복순 할머니도 집에서 담갔다며 유리병에 담긴 생강청을 들고 왔지요. 선희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박사님답게 말로 다 합니다.

 저녁에 복순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희 박사님이 아직 애가 없어서 철이 없고 만, 박사를 책으로 혔나벼.”라며 저를 위로합니다.

 선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합니다. 시간도 상관없습니다. 논문을 쓰다가 뭔가가 막히면 나를 붙잡고 “인터뷰하자” 하면서 떠들어댑니다. 논문에 도움이 되나보다 해서 저녁밥도 안 먹고 대답해 줄 때도 있고, 밤 12시가 넘어 남편이 자꾸 눈치를 주는 바람에 끊을 때도 있었습니다.

 차량봉사는 제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희 옆에서 뭔가 초라해지고 서운해지는 감정이 올라올 즈음 저도 제 가정 일이 바빠진 것이지요.

 복순 할머니에게 안부 전화가 왔습니다. 어떻게 지내냐고요. 선희도 차량지원자는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자꾸 할머니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바람에 할머니들이 선희보고 오지 말라고 했다고요. 선희 대신 퇴직한 조금 젊은 할머니 봉사자가 온답니다. 이번 봉사자는 같이 토론하고 대화를 하다보니 더 좋다고 하네요. 같이 움직이니 덜 미안하고요.

 요즘 아침이면 텀블러에 얼음 가득 채운 아이스 커피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탑니다. 재택근무하는 남편 책상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지요. 남편은 제 손맛이 들어간 커피가 좋다 합니다. 아이스 커피는 하루종일 천천히 마신다하네요. 저는 커피 알 만 들어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쥡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잔잔히 울려퍼지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수동그라인더로 커피를 가는  선희를 떠올립니다. ‘지금은 좀 달려졌을려나’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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