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이모가
학교가 조용하다 못해 적막이 흐른다. ‘왜 이리 썰렁하지?’하며 계단 위 창문을 보는데, ‘아, 방학이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그렇지, 방학이라 조용하구나.’ 교무실은 날씨가 추운데도 문이 열려 있다. 똑똑! 출입문 앞에 서서 교무실 안을 기웃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오른쪽 책상으로 내 시선이 가고, 그 자리의 짧은 머리를 뒤로 묶고 어깨에 하얀 카디건을 두른 젊은 여선생이 일어난다. 교무실로 발을 넣고 손바닥 만한 종이를 내밀며 “학교 재배정으로...”라고 이야기를 꺼내니, 여선생은 내 앞을 지나 가운데 둥근 테이블의 유인물을 한 부 가져와 내 손에 들린 종이와 바꿔간다. “교과서는 3월 2일에 나누어줘요.” 여선생은 나보다 키가 커서 내 손에 들린 프린트물의 ‘엘리트 교복’을 검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치는데 고개를 숙인다. “여기 전화해 보셔서 교복 맞추시고요”. 여선생에게 고맙다고 눈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교과서를 3월 2일에 나누어준다니, 그나마 덜 미안한 감정이 든다. 교과서를 오늘 받으나 3월 2일 입학식에 받으나 별 차이는 없지만, 혹시나 그전에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길지도 모르니 이 학교의 교과서를 하루라도 더 늦게 받는 게 마음이 편하기는 하다.
지난번 교육청에서 받은 접수증을 배정표로 바꿔 중학교에 가져다주기까지 30분이 안 걸렸다. 종이 한 장을 학교에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실감이 난다. 오래 머무를 학교는 아니지만.
학교 건물 정 중앙 시계는 11시 30분, 하늘은 참 파랗다. 구름 한 점 없다. 학교 양쪽으로 길쭉길쭉한 아파트들이 보인다. 학교도 아파트들도 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앞으로 또 2시간 20분을 달려야 한다. 종이 한 장을 위해 하루 5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 그래도 즐겁다. 어쩔 수 없이 번거로운 일을 겪고는 있지만 좀 더 나은 하루를 위해 선택한 거다. 이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동원이 되었지만, 그들의 직업이라 다 돈 받고 하는 일들이라 덜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학교 운동장과 주차장은 초록 그물을 두른 높다란 펜스가 구분해 주고 있다. 운동장으로 차들이 돌진하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 같다. 초록 그물이 자주빛깔 벽돌 학교를 그나마 산뜻한 느낌이 나게 해 준다. 시동을 켜고 출발이다.
고속도로, 앞만 보고 막 달리는데, 문득 아이들 점심밥이 생각난다. 아!, 주문해 주기로 했는데, 다행히 도로가 한산하고 옆으로 갓길이 보인다. 정차하고 배달의 민족 어플을 켠다. 참 편한 세상이다. 전화할 것도 없고, 인터넷 들어가서 몇 번 클릭만 하면 집으로 배달.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주문했으니 잘 챙겨 먹으라고, 내 엄마도 잘 챙겨 드리라고 부탁을 한 번 더 한다. 이제 아이들이 컸다. 내 엄마에게 전화해서 아이들 부탁을 해야 하는데, 귀가 어두워서 몇 번을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상황이라 말귀 잘 알아듣는 아이들에게 엄마를 부탁하는 것이 더 편한 거다.
내 엄마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건 막내 이모다. 엄마와는 딱 9년 차이, 같은 부모를 둔 자매인데 참 다르다. ‘가끔은 엄마가 다른 건가?’라는 생각도 해 본다. 엄마는 해방둥이. 광복절 즈음이 엄마 생신이다. 시골이지만 양조장과 정미소를 운영한 할아버지의 셋째 부인. 내 외할머니를 소개하라 하면 이 문장이 제일 먼저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셋째 부인을 강조한 건, 내 엄마의 법적 엄마는 내 외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다. 법적 엄마가 중요한 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본인 이름으로 있던 논을 자식들이 물려받지 못했다. 그 당시 약지 못했던 엄마는 명의를 이전하지 못했고, 외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땅을 국가에 헌납을 했다. 그걸 찾아오려고 법적 소송을 했지만 기각당했다. 우리나라는 법이 중요한 나라라서. 양조장과 정미소를 운영했다는 외할아버지, 정식 첫째 부인에게서는 딸만 둘, 술에 잔뜩 취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을 낳아준 둘째 부인, 외할아버지는 운명할 때까지도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단다. 왜 그랬는지? 외할아버지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인데, 외할아버지가 그랬단다. 집안에 불난이 들어온다고. 내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단다. 내 기억으로 외할아버지 댁과 외할머니 댁은 한참 멀었다. 외할머니 댁은 더 시골로 기억이 된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댁에 자주 찾아가는 바람에 동네 창피해서 외할머니가 외할머니를 따라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참 예뻤다. 키도 크고 호리호리하고 그랬다. 셋째 부인으로 들어와 그다지 고생은 안 했다고 한다. 다행히 아들을 하나 낳아서, 시어머니에게 이쁨도 받았단다. 막내 이모가 태어나고는 외할머니가 젖이 돌지 않아 동네 젖먹이 어멈을 들였는데, 외할아버지가 젖먹이 어멈이 밥 먹고 이모가 젖을 빨고 잠이 들 때까지 한 방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1954년생 이모라서 전쟁 직후라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가능했던 것도 같다. 외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어쩌면 가능한 것 일수도 있다. 그렇게 남의 젖 얻어먹고 자란 막내 이모, 그 이모가 있었다면 우리 엄마 노년이 쓸쓸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끔은 내 이모가 엄마였으면 할 때가 있었다. 더 이쁘고, 더 키가 크고, 더 잘하는 게 많고, 나에게 더 다정다감하고, 아무튼 내 엄마보다 무엇이든 더 나아 보였으니까.
애들 밥, 내 엄마 밥 챙겨주고 나니,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집 도착 예정시간은 1시 30분, 다시 엑셀을 지그시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