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로 가장 불편한 것은 책 읽을 때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책을 읽어주는 로봇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기가 막히게도 영상으로 만났다. 사람이 읽어주기 때문에 더 친근하고 친숙하다. 소파에 누워 요약내용만이라도 들으니 너무 즐겁다.
오늘 감상한 내용 중 돈 맛에 대한 글이 마음속에 남아 되새겨진다.
돈 맛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아끼는 맛이란다. 청국장처럼 푸근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 같은 맛이다.
둘째는 쓰는 맛인데 가성비와 가치소비가 있다.자린고비의 굴비맛이라고 한다. 4인 가족이 외식할 경우 가족수만큼 주문하지 않고 3인분만 시켜 다소 부족하지만 외식기분을 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으는 맛인데 삭힌 홍어애탕맛이란다. 중독성이 강해 끊지 못하는 맛으로 세 가지 맛 중 이 맛을 특히 강조했다.
남편 월급 중 2백만 원을 퇴직 직전까지 25년간 6억 원을 모아 대출금과 함께 부동산을 구입했다. 이렇게 자산을 불려 현재는 서울에 있는 아파트 3채를 가진 주부이자 재력가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대단한 경제관념을 지닌 분이며 고수의 향기가 난다. 어떻게 음식맛을 돈 맛에 연결 지어 표현을 할까?
난 이분처럼 노후대비를 잘할 수 있을까?
난 이분처럼 투자를 잘하고 있는 걸까?
난 이분처럼 돈 맛을 아나?
생각을 연이어하다 내린 결론은 난 이분이 아니구나.
난 나구나. 내식대로 하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럽지.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돈의 맛도 음식 맛도 기호가 있는 것 아닌가.
난 달달한 맛을 좋아하는 설탕 중독자라서 모든 음식이 달아야 한다. 청국장도 달아야 좋은데 남편은 질색한다.
아끼는 맛을 청국장에 비유한 주부는10원짜리도 주워 모으는 습관이 있다. 그중 한 개가 3천만 원 가치의 동전이었다고 한다. 또 신혼 때 남편이 사준 옷을 현재까지 입는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아끼는 맛은 아이스크림 맛이다. 결혼 후 집을 장만하면서 빚을 졌다.월급에서 일부를 고정금액으로 갚았으며 보너스달은 목돈이 들어오므로 몽땅 상환하면 숫자가 그만큼 많이 줄어재미있었다. 골프 점수 계산법처럼 말이다.상환 날은 우리 부부가 거하게 만찬을 먹는 날이고 후식까지 알차게 챙겨 아이스크림이나 치즈케이크 등 달콤한 것을 먹는다. 현재는 채무를 다 갚았지만 월급날은 항상 만찬을 먹는다.
이때 난 10원짜리며 백 원짜리를 모으지 않았고 집안에 돌아다니면 저금통에 잠시 넣어 뒀다가 무거워지면 은행에서 지폐로 바꿨다. 옷도 철마다 필요하니 구입했다. 뱃살이 늘어나 작아져 못 입었고 일하는 사람이 추레하게 다닐 수 없었으며 해마다 사는데도 입을 옷이 없었다.
다음은 쓰는 맛이다.이 맛은 자린고비의 굴비맛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짜고 구린내 나는 맛이라고 표현했다. 4인가족이 모처럼 한우를 먹으러 갔는데 3인분만 주문하니 언쟁을 했고 자녀들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가족과 외식을 안 하겠다고 작정한 모양이다.
나에게 쓰는 맛은 과일 맛이다. 여름에 먹는 달콤한 수박이나 한겨울에 먹는 설향 맛과 천혜향, 레드향 이외에도 샤인머스캣, 블랙사파이어, 곶감, 홍로, 부사, 피치애플 맛은 눈이 부셔 감고 먹어야 한다.
아이스크림 맛과 살짝 차이 나는 것은 빚을 갚기 위해 아껴야 하는 보상심리로 먹어서인지 더 자극적인 단맛이 좋았다. 과일 맛은 천연의 단 맛이라 선물처럼 기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달달한 맛이다.
2월 중순경 비행기 한 번을 못 타신 친정어머니와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는데 예상보다 비용이 컸다. 이 비용이면 동남아 여행도 가능하다 생각했지만 다녀오고 나니 참 잘했다. 주상절리에서 콧노래를 하시던 엄마모습과 잉꼬새를 손목에 올려놓고 대화를 시작하시던 장면들. 앵무새가 뭘 알아듣겠는가. 어머니 손등에 뚝 튀어나온 혈관을 부리로 잡고 흔들어 놀라시기만 했는데도 즐거워하셨다.남편은 남편대로 어머니와 나를 놓칠세라 순간순간 사진으로 담아줘 고마운 마음이 넘쳐흘렀다. 사실 이번 효도여행계획도 남편이 제안해서 실행했기에 더 고맙다.이것이 돈 쓰는 맛이다.
나에게 모으는 맛은 밥 맛이다. 쓰고 보니 어째 어감이 좋지 않은데, 정말 밥 맛과 같다.
배가 몹시 고픈 상태에서는 짧은 시간에 씹어도 단맛이 나지만 간식을 먹어 포만감이 있거나 스트레스로 밥 맛이 없을 때는 단맛을 못 느낀다. 오래오래 씹어야 비로소 단맛을 느낀다.
돈을 모으는 맛도 이와 같다. 첫 술에 배가 부르지 않으니 모으는 행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처음 씨앗돈을 모을 때 백만 원이라도 모으면 감칠맛난다.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때가 몹시 배고플 때라서 단맛을 빠른 시간에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억을 모으려면 언제 모으냐며 한 숨도 나오고 중간에 아프거나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는 등 목돈 쓸 곳이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오래도록 씹는 기간이 필요하다.
목표하는 1억을 모아 단맛을 느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에 밥 맛은 늘 같다. 홍어애탕처럼중독성 있다기보다 안 먹어도 그만인 주식(主食)이다. 요즘은 밥 아니어도 다양한 식품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맛에 중독되어 모으는 것과 밥 먹듯 모으는 행동의 차이가 뭘까?
처음 씨앗돈 모으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때다. 미친 듯이 돈 모으기에중독되어극단적으로 생활비를 아꼈다. 콩나물과 두부를 살 때 십원, 백 원의 차이로 할인제품을 골랐다. 입는 것도 사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옷을 사주는데, 무조건 할인하지 않으면 안 입는다 하니 싼 옷이라며 사진을 찍어 구입의향을 물어볼 정도였다.
숨 막히는 생활을 해도 목표한 돈을 모아야 했기에 노력했다.
그러자 모으고 난 후 허탈했다. 노력하는 동안 종잣돈은 생겼으나 나는 싸구려가 되어있었다. 돈 한 푼을 무서워 못쓰고 상전 모시듯 했으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내 삶도 그대로였으며, 나는 여전히 똑같은 밥을 먹고 있었다.
다만, 조금 달라진 거라면 나의 행복과 자존감이 돈보다 우선해야 한다는마음이다.
아끼는 맛도, 쓰는 맛도, 모으는 맛도 나와 가족이 기꺼이 동참해야 흐뭇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 마침내 그 맛이 느껴진다.
중독성은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돈 모으기에 집중하도록 동력을 제공하지만 자칫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만들므로 목표달성과 함께 허전함이 찾아온다.물론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부동산 3채로 보답을 받아 성취감과 기쁨을 맛봤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큰 부자가아니어서인지 부동산은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돈 모으기는 중독성 없이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돌이켜보면내가 가장행복했을 때는빚진 시절이다.모으는 맛을 아는 지금보다 아끼는 맛일 때가 더 행복했다.
이 시기에 무엇이 이토록 나에게 행복감을 줬나 생각해 보니 빚 갚는 월급날 소소하게 우리 부부가 만찬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벤트를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독성 강한 음식 맛이 모으는 맛이라며 종잣돈 모으기의 중요성을 제시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밥을단맛이 나오도록 시간을 들여 매일 씹어 먹으면 돈은 모인다.
다시 먹고 싶은 맛있는 맛이 아니어도 밥의 단맛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행복하도록 돈을 즐겁게 쓰면서 일부를 모으는 것이다. 마치 '소확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순화시킨 표현이라며 커피값도 아껴서 주식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십은 것까지 아껴서 투자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 것 쓰고 행복감 느끼며 모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부자로 살겠다는 지향점이 같으면 지름길로 가든, 둘레길로 가든 낙담 없이 가면 그만이다.
빨강머리 앤은대학 진학을꿈꿨다. 그러나 메튜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릴라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이때 앤은 대학 진학 대신 교사의 길을 걷는다. 마릴라는 말리지만 앤은 말한다.
"마릴라아주머니 대학 진학은 꼭 할 거예요. 다만 지름길 아닌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아주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요. 이렇게 잘 키워주셨잖아요. 고마워요. 아주머니."
돈 모으는 것도 이와 같다. 가족원도 이롭게,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산에 오를 때 앞만 보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정상에 일찍 오른 이도 있지만 좌우 꽃도 보고,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여유 있고 느긋하게 오르는 사람도 있다.
돈 모으기도 각자 보폭에 맞춰 걷듯이 하면 된다.
아끼는 맛, 쓰는 맛. 모으는 맛을 잘 느끼려면 내가 행복하도록 생애를 가꿔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가족도, 지인도, 타인도 그 감정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주부도 빨강머리 앤과 같은 마음으로 가족 수만큼 4인분을 주문해 먹었더라면자녀들도 다시는 가족과 외식을 안 하겠다는 말대신, 외식이 기다려지고 즐거웠을 것이다. 또 저자도 아끼는 맛이 짜고 구린내 난다는 말이 아닌, 기쁘고 고마운 맛으로 기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