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묵시룩>

동재

by 동재

계시룩의 백야를 모독한 꽃 한 송이
칠흑 같던 어둠 속 보라색 라일락


죽음에서 나는 펄럭이며 사라졌네

먼 미래 피어나 사라질 서화들에게
바치는 한 송이 자살 묵시록 첫 문장


밤하늘 빛나는 별들과 우주 사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이 있다

누구보다 빛나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했던 별들의 하소

초신성 너머를 보고야 알았다


나는 더 이상 저 너머 
별들의 빛을 부러워할 수 없었다


나와 당신이 좋아했던 별들은 
더 빛을 내고자 나락에서부터 조각조각 
흩어지고 깨지며 결국 모두 별자리가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실증이 나버렸다
아름다운 별자리들의 이야기가
더 빛나는 별들의 조롱거리로 
남아버렸단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비판의 총성들은 멈추지 않고
별자리들은 더욱 또렷하게 밤하늘 길이 됐다
마치 포기해도 괜찮다며 위로해 줬다


별자리들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우리들은 더 빛나기 위해 소원을 빌었을까 
하늘을 뒤덮은 별자리를 향해 주먹을 더 꽉 쥐었을까


묵시록의 사애를 아랑의 서련이라 착각했다 
나는 그런 인류애와 애정의 아름다움을 
바보같이 믿어 매우 사랑했다

배반자의 빛에 추락한 모든 이들은
별들의 피로 채워진 초신성 바다 위에서
이름도 이야기도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들은 일백 꿈의 요람을

걷는 파수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꿈을 잃고 추락한 자들을 만나 
그들이 건네준 노란 튤립 한 송이와 한 책장
묘운의 솜털 위로 건넨 꽃의 의미를 몰랐다

그저 살아가고자 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추락한 자들의 눈물은 미소로 가득했고
더 빛나는 인간들의 잔혹성은 끝이 없었다


자살 묵시록의 주인이 돼버렸단 사실에
나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질문할 수 없었다


초신성에 비친 나의 요람들을 향해
눈물도 웃음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잘 보이는 
어느 썩어버린 느티나무 위에서
아련히 묵시록의 마지막 장을 다시 적어본다


자살 묵시록 마지막 장, 첫 문장


저는 참 아름답기 그지없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아름답게 살지 못합니다

만상의 찰나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연
그러니 앞으로도 기적을 바라며 살지 않겠습니다


자살 묵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


천비를 꿈꾸던 자는 매일 죽음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는지 모른다

온 세상의 패자로 남아 스스로를 증오했다
창살 사이로 쏟아진 홍경들의 위안에 분노했다
세상을 향해 나는 구원을 원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묵시록의 
끝을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나 기억이 난다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했던 어떤 이의 
계시록을 모독한 한 죄인

자살 묵시록의 마지막 주인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