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티의 여인들’에 대한 한국의 대답

<항아리와 여인들> 김환기

by 상조

김환기의 작품 ‘항아리와 여인들’은 그를 대표하는 점묘 추상화들과는 다르게 보다 구체적인 형상과 이야기성을 가진 작품이다. 화면은 수평으로 하늘과 바다, 육지로 삼등분돼 있다. 푸른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해변에는 피란민들의 천막이 조그맣게 묘사돼 있다. 그림 속 여성들은 저마다 당당한 모습으로 달항아리를 소중히 이거나 보듬고 있다. 전쟁의 암울함을 나타냈다기보다는 달항아리에 평화와 행복을 담으려는 간절한 염원처럼 보였다. 어떤 항아리에는 물고기가 들어 있는 등, 단순한 정물 이상의 서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맨 앞의 여인은 옷을 입지 않은 채 등장하는데, 이것이 내겐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불쾌하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고 담담하며,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연결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난 고갱의 ‘타히티 여인들’이 떠올랐다. 한국적 요소 속에서 서구 회화의 이미지들이 연상되었다.

<타히티의 여인들> 폴 고갱

김환기의 다른 작품들도 보면 ‘기분 좋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의 그림은 한국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되, 서구적인 추상방식으로 표현된다. ‘매화항아리’를 보면 수직과 수평으로 정돈된 매화나무 가지의 구도에서 데 스틸같은 모더니즘 스타일이 떠오르고, ‘항아리와 여인들’에서는 앞서 언급한 고갱의 작품과의 연결이 느껴진다. 이러한 요소들이 불협화음을 이루지 않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잘 어울리는 점이 김환기 작품의 매력인 것 같다.

우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몬드리안

김환기는 “화가는 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전에, 먼저 아름다운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예술가란 눈으로 사는 존재이며,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과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예술을 ‘강렬한 민족의 노래’라고 말하며,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오히려 한국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실제 그의 작품에서 실현된 것이다.


예전에 김환기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의 내면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 특히 자주 사용하는 파란색을 보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항아리와 여인들’의 바다와 하늘 역시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은유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또, 프랑스 니스의 한 라디오 방송에 초청되었던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통역을 해줄까 묻는 방송국 측에 한국어로 말하겠다고 하고 생방송에서 끝까지 한국어로만 말하고 왔다고 한다. 이는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예술관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한국적인 요소’를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꿰뚫는 시선으로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그려낸 것이다.


결국 김환기의 그림은 단지 한국의 자연과 전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적인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예술적 시도였다. ‘항아리와 여인들’은 그 시도의 한 장면이자, 그의 정신과 감성이 가장 따뜻하게, 그리고 깊게 배어 있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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