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후기(woods가 아니라 왜wood인가)

woods가 아니라 왜wood인가

by 다크브라운

이 책을 보다가 제목이 왜 wood인가에 꽂혔다. 특히 하루키는 번역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단순오역을 하진 않았을듯한데.. 그러한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된다.

1. 하루키가 살아가던 일본의 시대상: 이상이 꺼진 자리, 고립된 개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을 출간한 1987년의 일본은, 겉으로 보자면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화로웠다. 고도경제성장기의 끝자락, 버블경제의 절정기였고, 전후의 가난은 더 이상 기억이 아닌 신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풍요의 이면에는 커다란 균열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적 열정의 소멸,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개인의 고립이 그것이다.

하루키는 60년대 말 일본 전역을 흔든 학생운동의 세대에 속했지만, 그는 그 운동에 깊숙이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이념적 열정에 거리감을 두고, 비이념적이고 탈정치적인 청춘의 삶에 주목했다.

그는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은 “주인공이 싸우고, 성장하고, 승리하는” 일본 문학의 주류 전통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선택한 길은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 사회로부터 회수되지 못한 감정, 애도되지 못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바꿀 수도, 남길 수도 없었던 청춘들이 감정을 감당해내는 방식에 대한 문학적 응답이다.

이제 아무도 함께 싸우지 않고, 누구도 확신을 말하지 않는 시대. 하루키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확실하지 않고, 연결되지 않으며, 끝내 남겨지는 감정의 무늬를 포착해낸 것이다.

2. 한국에서 히트를 했을 때의 시대상: 운동의 종언, 그리고 정서적 진공


“노르웨이의 숲”이 한국에 번역·출간된 시점은 1990년대 초반, 제목은 ”상실의 시대“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허무 속에 있었다. 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종식은 하나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 다음을 살아가야 할 청춘들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남았다. 공동체가 아닌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표가 남았을 것이다.

이 시기의 청춘들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운동권의 시기를 통과해 온 세대’였다.

공동체적 서사 안에 들지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이들은 기존의 ‘정치적 열정’과 ‘연대의 언어’로는 감당되지 않는 감정과 삶의 복잡성에 봉착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정치가 아니라 감정, 담론이 아니라 분위기, 이념이 아니라 상실을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들의 허무를 정당화해주지는 않지만, 그 허무에 이름을 붙여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90년대 초 한국 대학생들에게 일종의 감정적 번역자로 받아들여졌다.

”노르웨이의 숲“은 바로 그 ‘상실의 시대’에, 함께 살고 있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연결되지 않는 청춘들의 고독을 대변한 것이다.

3. 그럼 왜 ‘wood’가 맞고, ‘woods’가 아닌가: 공동체 밖에 놓인 감정의 숲


제목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영어에서 wood는 ‘목재’, 또는 단수 개념의 숲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숲속’은 woods가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왜 하루키는, 또는 비틀즈는, 이 곡과 작품의 제목을 Norwegian Wood라고 했을까?

이 선택은 단어의 문법적 적절성보다, 정서적 뉘앙스와 깊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woods’는 여럿이 함께 들어가는 실제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wood’는 정서적으로 닿을 수 없고, 물리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며, 더 고립된 공간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wood’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 이미 지나간 기억, 돌아갈 수 없는 감정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동체적으로 헤매는 숲(woods)이 아니라, 개인이 침잠한 내면의 숲(wood)이다.

아마 그래서 이 소설은 더 이상 우리는 함께 있지 않고, 그 숲은 실제가 아니라, 내 기억과 상실이 만든 조용한 풍경일 뿐이라는 것.

90년대 한국의 독자들은, 여전히 ‘woods’를 갈망하면서도 결국 ‘wood’에 혼자 남아 있는 자신들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그렇기에 wood라는 단어의 비문법적 고립감은 오히려 이 소설의 핵심 정서를 가장 정직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되었다.


4.마무리: 숲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로 남겨진 청춘들


“노르웨이의 숲”은 어떤 영웅적 서사도, 정치적 메시지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과 상실의 서사 속에는, 한 시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루키는 거대한 서사의 언저리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감정을 붙잡았고, 한국 독자들은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의 고립과 상실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다름 아닌,‘woods(공동체)’가 아니라 ‘wood(개인)에 남겨진 청춘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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