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작가의 온전한 사랑의 이해 후기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단지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정직하게 관계 맺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온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구조를 관찰하고, 감정의 원리를 탐구하며, 관계의 패턴을 분석하려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삶을 버티게 해주는 기초 체력일지 모른다.
하지만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선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과학은 ‘어떻게’에 대답하지만, 사랑과 존재의 문제는 언제나 ‘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왜’를 끝까지 밀고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신학의 문턱에 선다.
어디서 왔는가, 왜 사랑하려 하는가, 나의 선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 질문은 단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존재, 즉 삶을 해석하는 관점의 문제다.
어쩌면 ‘왜’라는 질문은 가장 인간다운 질문이다.
우리가 삶을 처음 배울 때, 아이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것도 바로 이 ‘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철학과 신학, 나아가 사랑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지식을 하나 더 배우는 일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왜’를 하나 더 묻는 일은 우리를 자신의 내면으로, 그리고 위로 이끌어 올린다. 지식은 유한함을 이해하게 하지만, 질문은 무한한 잠재성을 깨우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그 둘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단순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마음. 계산과 헌신,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서 우리는 사랑을 실험한다. 그 실험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나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줌’의 이면에는 받고 싶은 무언가가 늘 놓여 있다. 돌려받고 싶은 말, 인정받고 싶은 감정, 버림받지 않겠다는 보증서.
그것이 물질이든 정서이든,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거래를 시도한다.
“이만큼이면, 너도 나처럼 진심일까.”
“이만큼이면, 이번엔 나를 떠나지 않겠지?”
“이만큼이면, 나도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시장지향형 사랑의 뿌리에서 비롯된다.
효율과 보상, 손익과 교환의 논리가 그 중심을 이룬다.
사랑조차도 자신이 받을 ‘이익’에 따라 판단하는 이 방식은, 사랑의 형태라 생각될 수는 있으나,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본능처럼 이런 형태를 통과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점점 다른 사랑을 꿈꾸게 된다. 조건 없이 머물고, 이유 없이 지지하며, 말 없이도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 그것이 바로 더 성숙한 사랑의 형태다.
처음엔 이러한 형태는 더디고 불확실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느린 리듬 속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관계를 배울 수 있다. 교환이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 효율이 아닌 함께 버티는 지속성. 우리는 그 사랑을 배우는 중이다. 거래에서 시작해 신뢰로 나아가는, 어쩌면 그게 사랑의 방향일지 모른다.
결국 사랑은 주는 행위이기 이전에, ‘왜 주는가’를 묻는 철학적 행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랑인가, 아니면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이 괜찮은 존재임을 증명받고 싶은 욕망인가.
그래서 사랑은,
삶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과학,
존재의 이유를 탐색하는 철학,
그리고 의미를 신에게 묻는 어쩌면 나에게 묻는 신학적 상상력이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조금씩 더 온전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지식은 우리를 앞으로 이끌고, 질문은 우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사랑은,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성숙한 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