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욕망

공백

by 다크브라운

1.요즘 나는 답장을 자주 미룬다.

예전엔 그렇진 않았다.

무언가를 게을리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내가 내 삶에 집중하고 있다는 감각이 더 크다.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고, 나는 그 하루 속에서 무엇에 시간을 쓰고 있는지 더 또렷하게 알게 된다.

누군가의 말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에너지의 방향이 중요해졌다. 그건 내게 우선순위가 생겼다는 뜻이고, 그 우선순위는 나를 조용히 움직이게 만든다.

누군가의 안부를 놓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을 천천히 마주하고 있다.

말보다 더 앞서는 것이 있다는 걸,

나는 요즘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마치 음악을 들을 때 가사보다 리듬이 먼저 마음에 남는 것처럼. 우리는 결국, 말보다 먼저 살아야 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2. 욕망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도,

그게 정말 존재했었는지도,

혹은 어느 순간 흐릿해진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다.

더 잘하고 싶고, 더 단단해지고 싶고,

어제보다는 덜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전처럼 뜨거운 감정은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작은 온도,

손 안에 쥐고 있는 따뜻한 잔처럼,

한두 도쯤 미지근한 어떤 감각으로

내 안의 욕망은 여전히 천천히 불을 지피고 있다.

니체는 욕망을 존재를 넘어서려는 힘이라 했다.

내가 매일 반복하는 조용한 행위들이 어쩌면 나를 조금씩 넘어서게 만드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마치 종이 위에 한 줄씩 문장을 더해갈 때,

그 문장이 결국 나를 설명하게 되는 것처럼.

말없이 쌓인 사유와 반복은 결국 나를 만들고 있다.

3.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설득이나 주장보다 먼저,

사소한 반복과 조심스러운 일관성 안에서 생겨난다.

확신을 주는 말보다

차라리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

같은 방식으로 정돈된 생각,

변하지 않는 온도의 태도가 더 오래 기억된다.

그건, 꾸준히 자신을 다듬는 사람에게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공기 같은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이 사람은 그렇게 살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어떤 진실.

아마 신뢰는, 이해지향적인 욕망에서 자란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믿을 만한 존재로 남고 싶은 욕망.

그런 마음이 쌓이고, 반복되고,

어느 순간 말이 없어도 전해지기 시작한다.

신뢰는 그렇게, 조용히 몸 안의 감각처럼 자리를 잡는다.

4.나는 아직 어떤 모양의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잘 모른다.

가끔은 내가 흐릿한 윤곽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하루가 저물고, 달빛이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는 밤이면 나는 내 안의 조용한 진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느낀다.

그날의 발자국이

어제보다 조금 덜 흔들렸고,

더 깊이 바닥을 디뎠고,

불필요한 방향으로는 덜 돌아섰다면

그걸로는 충분하다고 느끼게 된다.

욕망은

밤하늘을 옆에서 밀어주는 바람처럼

나를 아주 천천히 앞으로 이끈다.

신뢰는

그 달빛이 나를 비추는 방식과 닮아 있다.

크게 외치지 않고, 멀리서 조용히 환해지는 방식.

나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이름 붙이지 못한 충실함을 품고

지금을 걷는 중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모든 소음이 가라앉고

몸 안의 숨결이 호수처럼 고요해질 때

달빛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닿는 순간이 있다.

그건 어쩌면,

내가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아주 부드러운 신호일지도 모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식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