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1.공원은 누군가의 계획에서 시작된다. 도시 설계자는 시민의 동선을 고려하고, 계절에 따라 바뀔 풍경을 계산하며, 쉼터와 조형물을 적절히 배치한다. 공원은 분명 의도를 품은 공간이다. 그러나 그 설계대로만 공원이 사용되는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늘 설계에서 비껴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공식적인 산책로보다 풀밭 사이에 난 지름길을 더 자주 밟기도 하고, 해가 예정보다 기울어지면 벤치 대신 그림자 속 나무 아래를 택한다. 공원은 설계된 대로 존재하지만, 살아 있는 방식은 늘 그 틀을 벗어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공원이란 공간은 인간의 관계를 사유하기에 흥미로운 비유가 된다. 관계 역시 처음엔 ‘이 사람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막연한 설계에서 시작된다. 첫인상, 말투, 취향, 태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머릿속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상상하고, 나름의 동선과 방향을 짠다. 그러나 실재하는 관계는 언제나 예상과 다르다. 좋아했던 사람이 멀어지고, 낯설었던 사람이 곁에 남는다. 관계는 결국 의도가 아닌 ‘접촉’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공원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공간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처음 그려 둔 이상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엇나가고, 그 엇나감을 어떻게 견뎌내는가가 관계의 형태를 결정짓는다. 그런 점에서, 설계되지 않은 자리에서 싹튼 관계야말로 가장 진실한 무늬를 가진다.
2.어제의 한강공원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엉성한’ 장소였다. 반포에서 잠원으로 갑자기 이동했고, 술과 물은 쏟아졌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서, 진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에는 반년 동안 함께 모임을 이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이 모임에 익숙해졌고, 때로는 멀어졌다가, 또 어느 날은 예기치 않게 가까워졌다. 관계는 그렇게 일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별다른 이유 없이 함께 앉아 있었고, 서로 음식을 나눠 먹으며 어디까지가 너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동화 속에 있었다. 공원이 늘 설계대로 흘러가지 않듯, 관계도 늘 선형적으로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엇나감들이 때로는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이어 주는 실이 된다.
3.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설계’하려 한다. 그래, 어제 우리가 나눴던 대화들처럼 진정성보다는 처세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알고, 더 친밀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모두 그 설계의 일부다.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계가 진정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설계가 한 번쯤은 무너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예기치 않게 멀어진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 했기에 멀어진 관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다가 결국 놓치게 된 마음. 관계는 오히려 모르는 채로 머무는 태도에서 더 오래 지속되곤 한다. 설계된 이해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 미리 계획한 친밀함보다는, 함께 걷다가 발견하게 되는 어떤 순간. 그 순간들이 관계의 가장 깊은 토양이 된다.
공원에서, 나는 ‘누군가가 만들지 않은 자리’가 왜 더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했다. 의도가 없는 자리, 설명되지 않는 공간, 틀어짐이 그대로 허용되는 곳. 그 틈이 있어야 숨이 쉬어졌다. 관계도 그렇다. 빈틈이 있어야 사람이 산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모든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관계. 우리는 그렇게 함께 있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4.결국 공원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보다, 수많은 시민들이 드나든 이후에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원을 다시 디자인하는 셈이다. 자주 앉는 벤치는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고, 사람들이 몰리는 자리엔 흙이 드러난다. 관계도 그렇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가능성의 지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로의 흔적이 덧입혀지고, 공존의 방식이 스스로 형성된다.
어제 우리가 앉은 자리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자유로웠고,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견디고, 조금 더 믿게 되었다. 공원은 그런 자리였고, 관계는 그런 공간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설계에서 벗어난 진실의 장소. 해가 기울어 생긴 그림자 속 벤치처럼, 때로는 예정보다 어긋난 순간들이 가장 따뜻한 자리를 만들어준다. 가끔 오래봅시다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