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작품화 vs. 개념의 상품화
2020년 조영남(가수&미술가)의 대작 논란이 대법원 무죄 확정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겠지만 전통적 미술의 개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50877.html
하지만 시대도 변했고 예술도 변합니다.
이제는 AI가 인간보다 더 잘 그립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예술은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회화, 조각 같은 전통적인 장르를 넘어, 개념미술, 초대형 설치 작품, 기계적 재현 시스템, 집단 창작 구조 등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면서 예술은 더 이상 예술가의 손끝에서만 태어나는 결과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술가는 작품의 형태를 직접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개념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예술 행위는 완성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땀흘려 일해서 버는 돈만이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는 개념도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때 예술은 손끝에서 피어났고, 자본은 금화와 함께 무게를 가졌습니다.
예술가는 물감을 짜고 붓을 들었고, 사업가는 공장에서 상품을 찍어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에 서 있습니다.
예술가는 붓 대신 개념을 조직하고,
투자자는 공장 대신 상상된 미래에 자본을 집행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더 이상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구조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아가고 있습니다.
1917년, 뒤샹은 한 전시회에 기성품 소변기를 출품합니다.
그는 그것을 **《샘 (Fountain)》**이라 부르고,
‘R. Mutt’라는 가짜 서명을 남깁니다.
그는 예술의 물질적 가치가 아닌,
“선택하고 명명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예술을 행위에서 개념으로 이동시키는 철학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질문은 강력했습니다.
“예술가는 반드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예술의 진짜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1917년, 마르셀 뒤샹은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그것을 예술이라 부릅니다.
그는 직접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선택하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예술은 물질이 아니라, 개념이다.”
그의 이 말은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뒤샹의 도발에서 한 세대가 흐른 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는 그 물음을 더 깊이 파고듭니다.
그의 대표작 **《하나이자 셋인 의자(One and Three Chairs)》**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습니다.
실제 의자
의자의 사진
사전적 정의를 출력한 종이
그는 말합니다.
“예술이란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다.”
“개념이 없다면 예술도 없다.”
그에게 예술은 감각이 아니라 사유입니다.
생각하는 행위 자체, 그것이 창작입니다.
그렇게 예술은 더 이상 미술관 벽에 걸려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개념의 구조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솔 르윗(Sol LeWitt)**은 개념미술이라는 말 자체를 명문화한 인물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예술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생산은 다른 사람이 해도 괜찮다.”
그의 대표작은 벽에 직접 그려지는 도형들입니다.
그는 그것을 스스로 그리지 않습니다.
도면만 남깁니다.
그리고 그 도면대로 작업자는 직선과 곡선을 벽에 옮깁니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개념의 설계자가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건축가적 창작입니다.
“건축가는 직접 벽돌을 쌓지 않는다.”
예술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술가는 이제 개념을 설계하는 자입니다.
직접 만들지 않아도 좋습니다.
실현은 다른 이가 대신하거나,
이제는 AI조차 개입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변화는 경제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한때 자본가는 토지나 공장을 통해 물리적 생산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투자가는 비물질적 개념,
즉 ‘잠재력’, ‘시장 가능성’, ‘네트워크 효과’ 같은
추상적 구조를 사고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직접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떤 아이디어가 가치화될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금을 배치합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창업하지 않는 창업가”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술가가 “직접 만들지 않는 창작자”가 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두 흐름 모두,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적 변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 산업화 시대: 생산의 시대
→ 실물(제품, 작품)을 만들고 파는 것이 핵심
● 후기산업 사회: 의미의 시대
→ 브랜드, 상징, 개념, 서사가 가치가 됨
이제 우리가 사고파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아이폰의 핵심은 부품이 아니라 애플이라는 서사,
NFT의 본질은 이미지가 아니라 희소성과 소속감입니다.
이처럼 예술과 자본은
형태의 거래에서 개념의 거래로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예술가는
형태보다 구조를 먼저 떠올립니다.
직접 생산하지 않고, 설계만 합니다.
물성이 아니라 메시지와 네트워크를 창조합니다.
현대 투자가도
실물보다 미래 구조와 맥락을 봅니다.
회사를 만들기보다 기회를 설계합니다.
‘돈’이 아니라 ‘의미’에 투자합니다.
그들은 모두 직접 행위보다 사유와 조율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어내느냐”보다,
“무엇을 가능하게 만드느냐”**입니다.
이 시대의 창조는 이제 손의 노동이 아니라, 개념의 조직화에서 시작됩니다.
‘예술가 vs 자본가’라는 전통적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둘 다 ‘개념 설계자’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미래의 예술가는
시장과 언어, 네트워크와 감정 구조를 시청각화할 것이고,
미래의 투자자는
가치와 관계, 시간성에 대한 구조를 사업화할 것입니다.
그들이 실현하는 건 기술이 아닌 질서이고,
그 질서는 누구나 실현 가능한 오픈소스적 창작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술가도, 투자자도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당신은 어떤 구조를 상상하는가?”
그 구조가 작품이 될 수도 있고,
기업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술가의 붓과 투자가의 포트폴리오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 뿌리의 이름은 바로 **개념(Concept)**입니다.
✍️ 예술가의 손이 멀어지고, 자본가의 공장이 사라졌을 때,
남는 건 오직 하나.
‘누가 더 깊고 명확하게 사고할 수 있는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