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Prime Minister'를 보고
***역사가 스포지만 이 글에는 영화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처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도 ‘뉴질랜드국제영화제’가 매년 치러진다. 지난 8월 개최된 ‘2025 뉴질랜드국제영화제’에 관객으로서 참여하고 싶었으나 놓쳤다. 올해 영화제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상영작은 ‘Prime Minister(총리)’. 저신다 아던 전 뉴질랜드 총리의 정치 역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로, 영화제 기간 전석 매진된 최고 인기작 중 하나였다. 아쉬워하던 차에 최근 영화관에서 정식 개봉한 사실을 알고 바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다큐멘터리이지만 극영화처럼 흥미진진했다.
‘Prime Minister'는 2017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약 5년간 뉴질랜드에서 총리로 활동한 저신다 아던 총리에 관한 기록물이다. 여성 수장인 데다 1980년생, 30대(당시 37세) 최연소 총리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2017년 뉴질랜드 제40대 총리가 된 직후 소감을 묻자 “내 나이도 아직 40은 아닌데”라며 웃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는 이런 ‘물리적 스펙’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의 강력한 대응, 다양성 존중, 총기 규제 강화, 빈곤 퇴치, 경제 양극화 해소 등 진보 가치 정책 실현으로 ‘저신다이즘(Jacinda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전 세계에서 ‘힙’한 정치인이었다.
영화는 저신다 재위 기간 집무실과 집에서 틈틈이 촬영한 장면, 당시의 육성 멘트를 엮어 총리로서의 성취와 고뇌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저신다가 아이를 스쿨버스에 데려다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재위 기간 출산했던 아이가 벌써 저만큼 자랐나 보다’ 호기심을 유발한다. (뉴질랜드에 없는) ‘노란 스쿨버스’에 아이를 태워 보낸 뒤 자신도 텀블러를 들고 출근하는데, 자막으로 그가 지금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음을 알려준다. 저신다는 2023년 퇴임 후 하버드대에서 초빙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2017년 10월 그는 ‘얼떨결에’ 총리가 됐다. 영화에서도 그는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앤드류(당시 노동당 대표)가 사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육성 증언한다. 2017년 당시 노동당 대표였던 앤드류 리틀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부진하자 전격 사퇴했고, 저신다가 대표직을 승계하면서 ‘드라마’가 시작됐다. 총선에서는 국민당에 졌으나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에 있었던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인 ‘NZ퍼스트’ 등과 연정 협상에 성공함으로써 총리직에 오른다. 극우당과의 연정 협상 때 ‘이민자 수용, 다양성 존중’ 원칙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끝내 연정에 성공해 환호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극적으로 뉴질랜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된 그는 재위 중 임신, 출산, 집무 중 모유수유, 딸을 안고 유엔 총회 참석 등 파격적인 ‘겉모습’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지만 기후변화 대응, 인류애 회복 등 가치 추구를 끊임없이 설파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더 평가받았어야 하는 정치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기후변화는 사기’라는 신념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당시 1기)과 유엔 총회 등에서 대립하는 장면은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강단을 보여준다.
2019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일어난 총기 테러는 그를 더 강력한 지도자로 만든다. 한 백인우월주의자 남성이 이슬람사원에서 벌인 이 총기 난사 사건은 뉴질랜드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 기록된다. 대국민 담화에서 “우리는 강력하게 비난한다”며 다양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를 강한 어조로 비난하면서도, 모스크를 찾아 피해자를 위로하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에서 정치란 곧 ‘공감’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눈물에만 그치지 않았다. 후속 조처로 공격용 무기 판매 및 소지 전면 금지법을 통과시켜 유통 금지, 총기 수거를 일사천리로 실행했고 “오바마도 못 한 일”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 같은 성과는 물론 코로나19라는 무시무시한 재난에 선제적으로 전면 셧다운에 나서며 바이러스 확산을 막은 데 힘입어 그는 간신히 총리가 됐던 2017년과는 다르게 2020년 큰 표 차로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팬데믹으로 확대되자 백신 의무 접종이라는 정부 방침을 발표했지만 미국처럼 백신 반대론자의 목소리가 커졌다.(영화 도중 ‘뉴질랜드인의 극우 사이트를 보는 비중이 호주의 2배, 캐나다의 3배’라며 탄식하는 코멘트가 나온다)
백신 의무 접종에 반대하며 웰링턴 총리 집무실과 의회 앞에서 폭력시위를 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의회를(감히 폭력으로 짓밟다니)”이라며 강력하게 대응하지만(이 장면은 꼭 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보는 것 같았다) 긴 병에는 효자 없다고, 장기화하는 팬데믹으로 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으며 국민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자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진다.
“호주의 경제성장률이 –5%인데 뉴질랜드는 –10%다. 총리는 경제를 위한 일을 하지 않는다(She doesn’t do the economy)”는 야당의 비판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민심 이반이 가속화하자 그는 억울해하면서도 커지는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퇴한다.
‘번아웃이 와서 그만둔 총리’ ‘워라밸을 위해 40대 초반에 정계은퇴’ ‘사퇴 기자회견에서 동거남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한 총리(영화에서도 사임 이후 결혼식 장면이 나온다)’ 등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사퇴를 가십으로 다뤘지만 실은 팬데믹 여파였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1900년대 초반 탐험가 섀클턴의 남극 탐험선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쇄빙선이 얼음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자(큰 위기에 봉착하자) 배에 탔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얼음을 깨기 시작하는데 활짝 웃는 표정이 눈에 띈다. 저신다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리더는 위기 때 낙관론(optimism)을 모은다.”
뉴질랜드 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렸다는(지금까지 경기가 좋지 않다) 부정적 평가도 여전히 현지에서는 강하지만 저신다는 ‘긍정의 리더십’을 통한 정치의 효용성에 관한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정치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영화는 평범한 이웃 같았던 총리(집과 집무실에서 주로 촬영돼 일과 육아 등 일상을 잘 보여줌)의 모습을 통해 ‘권위주의는 벗으면서도 (강력한 정책 실행을 통해) 권위는 보여줬던’ 새 시대 리더십을 확인하게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공감/포용/실용/소통을 바탕으로 한 감성 기반의 새로운 리더십 '저신다이즘'이 경제와 함께 두 날개로 날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