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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훈의 중국평론 Apr 26. 2022

거꾸로 가는 시계, 중국 공산당 part 1

헝다그룹 경영을 통해 보는 중국 비즈니스의 위기와 기회

본 내용은 2021년 10월, 동아비즈니스리뷰-DBR 제335호에 수록된 『360조 원 빚과 함께 추락한 방만 경영, 중국의 정책 역주행 대비 전략이 교훈』의 순화되고 검열되지 않은 원문 입니다.


또 하나의 경제적 사건이 터졌다.


역시 또 중국이다.


매해 한 건 이상 터지는 이러한 소동에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G2 시대임을 실감케 하는 이 반갑지 않은 현상에서 헝다그룹(恒大集團Evergrande Group)이 올해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헝다그룹


외신과 내신은 연일 헝다에 대한 뉴스와 분석을 쏟아내고 있으며 불안해하는 세계 증시는 일희일비(一喜一悲)를 숨기지 않고 출렁인다.


정작 조용한 건 중국 언론과 증시일 뿐이다.


한때 거대한 중국 대륙의 부동산 개발 2위 기업이었던 헝다는 약 360조 원(1조 9700억 위안)의 부채를 끌어안고 곧 직면할 부도와 공산당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혹자는 ‘리먼’의 악몽을 상기시키며 밀어닥칠 거대한 경제적 쓰나미를 예언하고, 또 다른 이들은 중국의 ‘계획경제’와 ‘경제 규모’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과도기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시크한 분석을 내놓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헝다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파급효과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헝다를 통해 우리가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경영 환경과 중국 기업의 경영 방식에 대해 본질을 찾아 집어보며 최근 들어 더욱 멀게 느껴지고 대다수가 그토록 기피하는 중국에서의 돈벌이, 사업 운영을 고민할 계기로 활용해 보려 한다.


이것은 이해하고 익혀서 잘하게 되고, 상대를 알고 싸워서 쟁취하여야 하는 우리의 미래 경제에 꼭 필요한 의식이기도 하다.


헝다그룹 타임라인


쉬자인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인 허난성(河南省)에서도 깡촌에서 태어난 헝다그룹의 창업주 쉬자인은 자수성가한 재벌들이 그러하듯 발군의 실력과 노련한 처세, 강력한 의지를 발판으로 한발 한발 중국 최고 부호의 길로 나아갔다.


홀아버지 밑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0년간, 대학 때의 전공을 살려 강철 회사 엔지니어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중국의 개혁개방 시류를 놓이지 않고 부동산으로의 업종 전환에 성공한다.


약년 38세, 광저우에 헝다를 설립하고 2000년대 중반, 광둥성(廣東省) 부동산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4100개의 부동산 개발, 관리 사업을 요체로 기업을 그룹화 한다.


이렇게 뻗어나간 헝다는 산하에 2873개의 계열사, 직접 고용인원 20만 명의 초대형 그룹이 되어 한때 기업가치 170조 원(145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하게 되고, 쉬 회장 역시 중국 1위 부호의 자리까지 올라서게 된다.


부동산 업계의 신화, 자수성가의 롤 모델, 중국 최고의 부자, 밀레니엄 기부왕...


세상이 부러워할 이 모든 타이틀을 거머쥔 그가 어쩌다 오늘의 나락까지 떨어졌는지에 대해 우리는 총 세 가지의 핵심적 원인을 가지고 따져보도록 하자.


<첫 번째 함정> 모럴 해저드


쉬자인 회장은 명실공히 중국 1등 기부왕이다.


기부 한 번 했다하면 그 액수가 수천억 원에 달하고 최근 10년간 매년 끊임없이 그 기부를 이어왔다.


하지만 중국 대부분 기업가들의 기부가 정부의 보이지 않는 강압에 의한 것이듯 그의 기부 역시 선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2015년부터 2020년 사이 헝다는 11번에 걸쳐 9조 2000억 원(500억 위안)을 주주들에게 배당한다.


그중 쉬 회장의 지분이 70%에 달하니 얼마큼의 배당을 받아갔을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다.


물론 그 배당금 중 일부가 정치자금, 결탁 세력의 비자금 등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중국 비즈니스 특성상 헝다 같은 규모의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쉬 회장이 헝다의 고배당을 결정하고 진행하던 그때, 헝다는 이미 부채 비율이 780%에 달했고 해외에서 13%에 달하는 고리성 달러 채권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정작 자신은 엄청난 현금을 챙기며 기부라는 형태로 그 배당의 엄청남에 상응하는 중국형 부유세(富裕稅)를 납부하고 세간에선 기부왕이라는 면죄부를 발급받으며 우쭐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홍콩과 호주에 개인 부동산과 전용 제트기, 요트 등을 구입하는 등 한 재산 축적하는 사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는 고금리의 빚더미를 쌓아가며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과 중국인의 도덕성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민족 차별과 인종 문제 등을 다루는 여러 단체들조차 이들에 대한 방패가 되어주길 기피하는 이 현상의 많은 원인이 중국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원천적인 다민족, 다문화 국가 중국은 차별과 생존이라는 대명제에 대해 긴 역사를 이어왔다.


땅은 크고 넓으나 옥토(沃土)와 박토(薄土)가 극단적으로 나뉘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지역과 위험한 지역이 크게 갈리는 지형적 차별.


싸움에 능한 민족과 전략전술에 능한 민족 간의 수많은 영토 분쟁, 왕권 교체 사이에 매 순간이 불안한 생존 가능성.


힘을 가진 자건 그 힘에 의존하여 사는 자건 생존 앞에서는 모두가 짚으로 만든 강아지일 뿐이었다(天地不仁, 以萬物而爲芻狗).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처음의 지형적 차별은 민족의 차별, 신분의 차별, 빈부의 차별로 뻗어나갔고 그 사이의 갈등은 시대가 흐르며 더욱 치열해져 개개인의 생존은 더욱 위태로워져만 갔다.


그러한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는 당연지사가 되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계몽과 선도를 목적한 위대한 사상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유가, 도가, 묵가, 법가라 한다.


하지만 사상은 깨어있는 자들 속에서만 자리했고 보편적 민간에서는 역시나 ‘공자 왈, 맹자 왈’ 일뿐이었다.


가뭄이나 전란이 찾아오면 “오늘은 너희 애, 내일은 우리 애를 잡아먹자” 했고 부를 가진 이들은 주변의 굶주림을 모른 척하며 곳간의 자물쇠를 더욱 단단히 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현생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 고귀한 삶,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우아함은 아둔한 자의 것이 되었다.


부귀영화를 이루려는 자들이 득세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치졸하고 교묘한 방책들이 학문(厚黑學후흑학)으로까지 발전하며 결과론적 사회가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며 시뻘건 깃발을 들고 강력히 일어선 것이 바로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다.


모두가 열심히 일해 균등한 분배를 이루고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홍길동과 같은 이상을 현실 속 집권 철학에 담아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출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공동을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나가기에는 수천 년 내려온 이기주의가 DNA 깊숙이 박혀 있었고 그것을 뿌리 뽑기에는 중국 인민들의 의식 수준이 너무도 낮았다.


설렁설렁 일해도 잘릴 일 없고, 빈둥거리며 시간만 때워도 배분이 약속된 새로운 사회에서 공평한 분배는커녕 분배할만한 성과 자체가 생겨나질 않는 것이었다.


기실, 해방을 맞은 중국인들에게 ‘균등’이라는 약속을 위한 의무와 책임은 제대로 설명된 적이 없었고, 이 거지같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건 바꿔준다는 선동은 막연히 낭만적이고 달콤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민들을 개도하기에는 그들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수준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다.


1958년, 가난에 신음하는 중국을 돌아보던 마오쩌둥은 허수아비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참새들로 농촌이 골머리를 썩이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별 큰 고민 없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참새는 참으로 해롭다.”


중국은 공산당이 국가 위에 군림한다.


국가 주석도 당 대표인 총서기의 아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당시 총서기임과 동시에 국가 주석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 국가 최고 존엄께서 하신 그 말 한마디에 참새는 졸지에 ‘인민의 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버렸다.


그리고 그 해, 중국 참새의 씨가 말랐다.


다음 해부터 난리가 났다.


진짜 주적인 참새들이 사라지자 해충들이 들끓기 시작하여 역사에 없던 흉년이 인 것이다.


자그마치 4000만 명에 가까운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한 예 일뿐, 매사가 이 모양이었으니 ‘모두가 부자’는 고사하고 숨 붙어 있는 것조차 신기할 지경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 시대에 와서야, 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생겨난다.


바로 ‘온포사회(溫飽社會)’ 건설이다.


“우선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그래야 뭐 후일에 부와 여유를 모두가 공평히 나눠 쓰는 강국을 만들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는가.”


근데 이걸 어찌 만든단 말인가?


구름에 달 가는듯한 이 목표에 강력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不管黑猫白猫, 捉到老鼠就好猫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이다.


흑과 백으로 묘사된 이 표현은 중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중의적인 형태로 활용되어 왔다.


검은 고양이가 자본주의 경제 모델이 되었다가, 흰 고양이가 정경유착 기업가도 되었다가, 또 독점기업이라는 얼룩무늬 고양이가 슬그머니 나타나기도 하였다.


경제발전에 대한 기대의 결과는 당연히 성공적이었다.


자신 스스로의 안락한 삶을 위해 똑똑하고 성실한 자, 교묘하고 영악한 자 모두 힘차게 질주하였고 인민과 사회는 노동력과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동참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온갖 색깔, 갖은 형태의 고양이들로 축제와도 같았고, 아수라판이기도 했다.


일당 독재 구조인 중국의 특성상 권력과의 결탁이 없는 사업은 규모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아이는 성장이 끝난 것이고, 성장이 끝난 인간은 이제 노화의 과정을 겪으며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성장이 끝나고 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그 끝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핑계로 인간의 도덕과 사회적 신의를 등지고 행하여지는 경영 행태, 개인의 치부를 위해 강행되는 터무니없는 고배당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설상가상, 덩샤오핑이 풀어놓은 고양이들을 시진핑 정부가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박멸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시장경제는 2004년 후진타오 정권에서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 박으며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고전적 공산주의의 절대 원칙인 공유재산 제도가 사라진 듯 했던 중국에서 최근 재산세의 시범 적용 지역이 확정되었고 부유세에 대한 논의 역시 활발하다.


다시 말해 “너의 마음대로 한 네 것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거의 정의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결국 친자식과도 같아야 할 자신의 기업, 형제와도 같은 동료 직원들의 살을 발라 주변을 달래고 개인이 치부한 것밖에 되지 않는 쉬 회장의 사업 운영 결과는 때마침 닥쳐온 공산당 이념의 회귀에 짚 강아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만 좇는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 공자


part 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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