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쿠젠이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했다.
23/24 시즌 분데스리가 29라운드, 레버쿠젠이 베르더 브레멘을 맞이해 플로리안 비르츠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5대0 대승을 기록하며 23/24 시즌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분데스리가 우승을 조기 확정 지었다. 이는 1904년 7월 창단 이후 레버쿠젠의 사상 첫 리그 우승이었다.
사비 알론소 감독 부임 이후 레버쿠젠은 클럽 역사뿐만이 아니라 유럽 축구 역사에 남을만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분데스리가 전통의 강자 바이에른 뮌헨이 23/24 시즌을 앞두고 토트넘에서 해리 케인을, 나폴리에서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한 김민재를 영입하면서 독주를 위한 준비를 마쳤지만, 알론소 감독과 레버쿠젠은 탄탄한 전술과 집념으로 분데스리가의 새로운 패자로 거듭났다.
빅터 보니페이스, 비르츠, 제레미 프림퐁, 에드몽 탑소바와 피에로 인카피에 등 23/24 시즌 레버쿠젠은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다. 알론소 감독은 이들을 적극 활용하며 한동안 트로피에서 멀어져 있던 레버쿠젠을 독일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레버쿠젠의 약진 속에는 젊은 감독과 선수들의 힘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숙성된 와인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듯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완숙한 기량을 뽐내는, 레버쿠젠의 조율사, 그라니트 자카의 23/24 시즌 활약상을 살펴보자.
그라니트 자카는 1980년 스위스 국적을 가진 중앙 미드필더이다. 스위스 최고의 축구 클럽 중 하나인 FC 바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자카는 10/11 시즌 처음으로 1군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데뷔하자마자 뛰어난 활약으로 주전 자리를 꿰찬 자카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12/13 시즌을 앞두고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했다. 빅리그로 이적했음에도 빠르게 팀에 안착한 자카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꾸준한 그의 활약과 어린 나이부터 많은 경기를 뛰며 쌓인 경험, 그리고 왼발잡이라는 희소성은 자카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렸다. 자연스럽게 자카에게 많은 관심이 쏠렸고, 그는 결국 16/17 시즌을 앞두고 아스날로 이적하게 된다.
아스날에서 부진에 빠지며 많은 비판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카의 입지는 확고했다. 자카는 아스날에서의 7 시즌 동안 단 한 시즌을 제외하고는 모두 40경기 이상 출전하면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의 중원을 지켰다.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2/23 시즌에는 9골 7도움을 올리며 커리어 사상 최고 공격 포인트를 기록, 최고의 시즌을 보내기도 한 자카는 레버쿠젠의 강렬한 구애를 받고 8년 만에 분데스리가로 복귀했다.
그리고 맞이한 23/24 시즌, 자카는 현역 시절 세계 최고 미드필더로 꼽히던 알론소 감독의 지휘 아래 안정적인 기량으로 레버쿠젠의 분데스리가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3/24 시즌 자카의 퍼포먼스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레버쿠젠의 플레이 스타일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위 차트는 23/24 시즌 유럽 5대 리그 클럽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나타낸 데이터이다. 레버쿠젠은 맨시티와 PSG 다음으로 많은 시퀀스당 5.1개의 패스를 기록하면서 점유율과 짧은 패스에 치중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였다. 레버쿠젠은 659개의 10개 이상의 패스로 구성된 시퀀스를 만들어내며 해당 부문에서 분데스리가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위 차트는 23/24 시즌 유럽 5대 리그 클럽들의 점유율과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터치 비율을 나타낸 데이터이다. 해당 데이터에서도 레버쿠젠은 63.1%의 평균 점유율을 기록하면서도 1098번의 상대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터치를 기록하며 맨시티(1,360), 아스널(1,299), 리버풀(1,237), 토트넘(1,193) 바이에른 뮌헨(1,181)에 이은 6위에 올랐다.
요약하자면, 23/24 시즌 레버쿠젠은 짧은 패스와 높은 점유율을 보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상대의 페널티 박스로 볼을 투입시키며 공격적으로 볼을 순환시키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자카는 시즌 내내 레버쿠젠이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22/23 시즌 자카는 아스날에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 중 왼쪽 미드필더로 배치되었다. 정확한 킥으로 공의 방향을 전환하고, 빈 공간으로 침투해 득점을 노리는 등 커리어 내내 맡았던 역할보다 공격적인 롤을 부여받았다.
자카의 역할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22/23 시즌 9골 7도움을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올렸고, 레버쿠젠은 이미 30대에 접어든 자카를 강력히 원했다.
역할 변경으로 괄목할만한 성적을 올린 자카였지만 레버쿠젠과 알론소는 자카에게 다시 한번 역할 변경을 요구했다. 알론소는 자카가 직접 득점을 노리거나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보다는 팀의 빌드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패스에 치중하길 바랐다.
그리고 자카는 이러한 알론소의 요구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위 데이터는 22/23 시즌 대비 23/24 시즌 자카가 기록한 터치맵이다. 자카는 아스날 시절보다 중앙에서의 플레이 빈도가 부쩍 늘어났다. 특히 중원 깊은 곳에서 공을 받는 횟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공격 포인트의 감소로 이어졌다.(직전 시즌 9골 7도움, 23/24 시즌 3골 1도움)
하지만 급감한 공격 포인트 대신, 자카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23/24 시즌 경기당 117번의 터치 횟수를 기록했다. 이는 유럽 5대 리그 기준 맨시티의 로드리(119)를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횟수이다.
또한 자카는 파이널 서드로 350회의 패스를 성공시키며 단순히 공을 돌리고 소유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자카가 기록한 350회라는 수치는 그가 직전 시즌 아스날에서 성공시켰던 159회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며, 유럽 5대 리그 기준 1위에 해당한다.
위 차트는 23/24 시즌 분데스리가 기준 공격 시퀀스 참여 횟수이다. 자카는 206회의 공격 시퀀스 참여 횟수를 기록하며 같은 레버쿠젠 소속인 비르츠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해당 데이터의 범위를 유럽 5대 리그 기준으로 더 넓혀봐도 자카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자카는 유럽 5대 리그 기준으로도 5위에 오르며 자신의 영향력이 단순히 분데스리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분데스리가와 유럽 5대 리그를 합쳐봐도, 로드리를 제외한다면 중앙 미드필더로는 자카가 유일하다는 점은 자카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레버쿠젠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져다줬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자카의 레버쿠젠 이적은 관점에 따라 커리어 황혼기의 시작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던 이적이었다.
하지만 자카는 레버쿠젠의 클럽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면서 알론소 감독의 믿음에 완벽히 부응했다. 자카의 영향력은 비단 그라운드 안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시즌 전, 알론소 감독과 시몬 롤프스 디렉터는 자카가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리더십을 발휘해 줄 베테랑을 원했고, 자카가 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알론소 감독은 자카를 두고 “자카는 나의 눈과 귀와 같다”라며 자카의 막대한 영향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레버쿠젠은 이제 첫 리그 우승을 넘어 무패 우승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향해 나아간다. 단 2경기만이 남아있는 가운데, 자카는 23/24 시즌 내내 그래왔듯이, 레버쿠젠의 중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