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모임
겨울이면 대부분의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군다. 자칫 겨울 산이 비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추운 날씨를 틈타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그중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이 있다.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은 4~5월경에는 애벌레로 나뭇잎을 먹고 산다. 산에 가면 흔히 만나는데 우리는 이 애벌레를 자벌레라고 부른다. 몸을 자처럼 사용해 뭔가를 재고 다니는 느낌이 드는 애벌레다. 이 애벌레가 앉아 있는 참나무류의 나뭇잎에는 갉아먹은 자국이 숭숭 나 있다.
봄에 애벌레로 왕성한 활동을 한 유충은 여름이 되면 땅속으로 들어간다. 번데기 상태로 여름잠을 자며 때를 기다린다.
10~11월 드디어 성충으로 우화 해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우화 해서 나온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의 암컷과 수컷의 모양은 전혀 딴판이다.
암컷은 날개가 퇴화해서 없다. 생김새가 마치 절지동물인 곤충처럼 보인다. 하지만 곤충처럼 피부는 딱딱하지 않고 나방처럼 몸에는 털이 나 있다.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의 암컷만 그리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암수의 생김새가 너무 달라 수컷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자리에 놓고 암수를 비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찍어서 가지고 있는 사진은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의 암컷뿐이었다. 수컷은 검색해서 찾아 그리기로 했다.
스케치보다 색칠하기가 어려웠다.
나방의 느낌을 어떻게 살려야 하나? 특히 생김새가 곤충 같은 암컷을 나방처럼 보이게 하려면 털의 느낌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는 1호 붓을 사용해 일일이 선을 그어 나갔다. 공들여 칠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한 번에 색칠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길 것 같았다.
암수가 생김새도 다르지만 무늬와 색깔도 달랐다. 수컷은 짙은 황갈색인데 암컷은 흰색바탕에 검은 점박이다.
그림의 마지막은 그림자 그려 넣기였다. 그림자는 참나무겨울가지나방을 훨씬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나, 다 그린 그림을 보고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수컷은 암컷 크기의 4배가 되는데 그걸 놓쳤다.
그림에서는 오히려 암컷이 더 컸다. 암수가 같이 있는 걸 보지 못하고 그린 탓이다. 수컷은 검색한 사진만 놓고 그린 탓이었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암수의 다른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드는 생각은 ‘왜 암컷은 날개를 퇴화시키고 무늬까지 다르게 변모했을까?’였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검색해 봤다.
하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겨울에 성충이 되어 날아다니는 겨울나방의 암컷 중에는 날개가 퇴화된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날씨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아다니면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거다. 성충이 되어 해야 할 일 중 가장 큰 일은 바로 짝짓기고 알 낳기다. 참나무겨울가지나방 암컷은 날아다닌 걸 포기하고 알 낳기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선택은 아니었을까?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겨울이 되면 참나무겨울가지나방 같은 겨울나방이 날아다니고, 나뭇잎과 덤불에 숨어 있던 새집도 보인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보이지 않던 새도 잘 보인다. 길 또한 훤히 드러난다.
모든 것이 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건, 옷매무새를 다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