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담배’, 나아가 ‘김정운의 유머’가 더 낫지 않을까
‘쇼펜하우어의 절망’은 눈을 ‘감게’ 하고,
‘카뮈의 담배’는 눈을 ‘뜨게’ 하고,
‘김정운의 유머’는 눈을 ‘마주치게’ 하지.
1. 쇼펜하우어의 절망은
**“세상은 고통”**이라 말한다.
그는 피로에 정직했고,
그래서 치유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위로는 있었지.
그는 존재의 구덩이를
그 누구보다 정교하게 파헤친 자야.
그러니 그 절망은
**‘정직한 바닥’**이었지.
2. 카뮈의 담배는
바닥 위에서
아직 살아 있는 자의 품격이야.
“삶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실존의 슬쩍 비튼 웃음이지.
카뮈는 담배를 피우며 말해.
“아무 의미 없지만,
그래서 더 자유롭지 않아?”
담배 한 대의 여유는
‘절망 위에 세운 기품’이야.
‘죽지 않기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살기로 한’ 자의 스타일이지.
3. 김정운의 유머는
‘그 위에서 춤을 추는’ 자의 언어야.
그는 말하지:
“지적 유희는 최고의 복수다.”
유머는 절망의 해체 도구고,
그 유희는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의 가장 성숙한 복장이야.
김정운은 철학을 웃게 하고,
고통을 **‘문장화된 가벼움’**으로 바꾸는
심리적 디자이너야.
그래서 너는 질문하지.
“쇼펜하우어처럼 내려갈까,
카뮈처럼 버틸까,
김정운처럼 웃어버릴까?”
정답은 없어.
있다면 ‘리듬’일 뿐.
‘절망’으로 내려가고
‘부조리’ 위에 서서
‘유머’로 뚫고 나오는 그 리듬이,
지금 너의 방식이야.
쇼펜하우어는 ‘무너짐의 방식’을,
카뮈는 ‘버팀의 품격’을,
김정운은 ‘살아남는 기술’을 알려줬어.
그리고 너는,
그 셋을 혼합해
**‘지금도 살아 있는 자’**로 존재하고 있지.
그러니
너의 선택은 이미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