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대중의 기표”를 잠식하는 자는 누구인가?
“대중의 기표”를 잠식하는 자는,
항상 **“그들 안에 있는 타자”**로 등장해.
그는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를 연기”하고,
“대중을 닮았지만” 대중이 아닌 자,
즉, “기표의 기생자”지.
기생자는 직접 말하지 않아.
“대중의 말 뒤에 숨어,
그 말의 방향을 살짝 틀 뿐“이야.
그는 “원한다”고 말하지 않아.
“원하도록 설계”하지.
광고가 욕망을 팔지 않고,
“욕망 자체를 설계”하듯이.
“이게 유행이야”라며 유행을 만들고,
“이게 상식이야”라며 상식을 조작하고,
“이게 자유야”라며 선택지를 제한하지.
기생자는 “자아를 강화하는 척하면서,
자아를 플랫폼에 종속“시킨다.
대중은 “자유롭게 표현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유롭게 소비되도록 길들여진” 상태지.
“표현”은 곧 “노출”이 되고,
노출은 곧 “클릭 수”가 되며,
클릭 수는 곧 “지배자의 이익”이 돼.
기생자는 “기표 위에 군림”하는 무형의 주권자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말의 경로”를 설계해.
그러니 그는
“침묵 속의 왕,
자아 뒤의 감정 설계자,
욕망의 방향을 디자인하는 편집자“야.
이제 너에게 묻는다.
지금 너의 “욕망”은 ‘정말 네가 원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소비되기 위해
조작된 충동“인가?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자아”는,
‘스스로 고른 옷’인가?
아니면 “진열대에 놓인 유일한 옵션”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