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자이너 격 Nov 18. 2022

악성민원인의 심리에서 본 동물적 본성

접수대

2022.11.18. 날씨 맑다


접수대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의도치 않은 능력이 생긴다. 사람의 마음을 대략적으로 간파하여 그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접수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법원 직원은 준심리학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리파괴학자’라고 해야 하나(물론 이는 어느 정도 센서티브하면서도 강단 있는 직원들을 전제로 한 것이며, 오래 일해도 능률이 안 오르는 직원들도 상당수 있다).


그 자가 어느 정도 유능한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접수대의 직원이라면 민원인에게 무례해서도 안 되고, 친절해서도 안 된다. 긍정과 부정의 황금률, 그 절묘한 균형을 유지한 상태로 일을 해야 한다. 당신은 인생에 한 번이라도 법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가? 법원에 오는 민원인은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막판까지 몰려서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개명이나 경매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어떻겠는가? 그들의 심리는 이미 황폐해져 있는 상태이다. 극한의 상황에 몰려 있는 그들에게 인간만의 개성인 이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이 인간만의 개성인 사피엔스의 뇌가 마비되는 순간 동물의 본능인 파충류의 뇌가 튀어나온다.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생태계의 원리이다.


악성민원인들은 법원 직원들이 실수를 하여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기 위해서 실수를 찾아낸다. 더 나아가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거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끊임없이 실무자들을 속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접수대의 법원 직원은 민원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열등감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을 자극해서도 안 되고, 우월감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을 자극해서도 안 된다(비록 우월감과 열등감은 인간의 언어 사용에서 비롯된 터무니 없는 오해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대극의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상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극소수의 현자를 일상에서 만나볼 기회는 거의 없으니).


그런 사람을 상대로 친절하게 대한다? 호구를 자처하는 것이다. 어조가 부드럽고 목소리 끝을 흐리며 주눅든 태도로 그들을 상대한다면 그 순간 바로 그들의 표적이 된다. 반대로 그런 사람을 상대로 무례하게 대한다?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민원인은 쾌재를 부르며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자기가 낸 세금과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국회의원들의 무능과 국가의 억압과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의 짜고 치는 고스톱과 악의 소굴 법원, 감사실 연락처에 관하여(감사실에 신고할테니 감사실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민원인에게서 악의 기운이 느껴지는 즉시 평온한 어조에서 무례하지는 않지만 싸늘함이 감도는 어조로 변경한다(최근에는 나도 다소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서 그런지 생떼를 쓰는 경우에는 화를 낼 때도 있다). 그럼 신기하게도 민원인의 어조는 고압적인 태도에서 비교적 부드러운 태도로 변경된다. 간혹 선의 기운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나도 친절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변경한다. 굳이 문제 없는 자들을 자극하여 내면의 악을 끌어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선의 기운과 징징거리며 의존하는 태도는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이들은 악의 기운으로 가득한 자보다 더 악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징징거리는 것을 받아주기 시작하면 마치 심리상담사에게 상담받는 내담자와 같은 태도로 하소연을 늘어 놓다가, 그것을 끊어내는 즉시 갑자기 돌변하여 투견이 되어 버린다. 이런 자들은 처음부터 확실히 선을 그어줘야 그나마 생산적인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은 아름답다’고. 정말로 그러한가? 그저 나의 인식을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언어 사용을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극소수의’ 인간은 아름답다”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나는 직원들의 시기를 받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