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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격 Nov 19. 2022

어쩌다 브런치 작가,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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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9. 날씨 맑다


나는 몇 달 전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의문점인데, 브런치 작가 심사에 통과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건가 하는 점이다. 내가 이런 의문점이 생긴 이유는 우연히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브런치에 한 번에 합격해서 너무 기쁘다는 글, 브런치 N수생이었는데 합격해서 너무 기쁘다는 글 등.


그렇다. 나는 브런치 작가 심사에 통과한 후 지금까지 거의 내 글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아마추어 작가들의 기회를 넓혀주고자 어느 정도 관대한 심사를 해주고 있는 관용적인 글쓰기 공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몇 달 전 우연히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이번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부랴부랴 작가 신청을 해서 합격을 했다. 그 후 지금까지 기존에 써왔던 글에 더해 줄창 글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물론 간간이 나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 주신 브런치 작가분들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 그 분들의 글을 본 적은 있다).


지금껏 별 생각 없이 글만 써오다가 한 번에 브런치 작가 심사에 통과한 것이 제법 대단한 것이라는 정보를 듣게 된 후 몇 달 후인 지금 새삼 뿌듯함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는 것을 느낀다(원효대사의 해골물에 얽힌 일화와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 정보를 알기 전과 정보를 안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봤을 때 사람의 마음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정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 즉 일련의 생각덩어리를 접했을 때 그것은 나의 의식 내로 들어와 나의 생각과 결합되어 새롭다고 여겨지는 생각으로 편집된다. 편집된 생각은 마음덩어리를 형성하여 감정이 편집된다. 감정이 동력이 되어 일련의 행동이 편집된다. 반복된 행동이 습관이 되어 태도가 편집된다. 태도가 습관이 되어 인상이 편집된다. 나아가 내가 보는 세상(세계관)이 편집된다.


나는 브런치 작가, 더 나아가 정식 출간 작가가 되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돈인가? 돈은 목적이 될 수 없다. 돈은 애당초 수단으로 만들어진 상징물일 뿐더러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작가를 한다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작업은 없다. 그렇다면 명성인가? 명성은 목적이 될 수 없다. 명성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더러 명성을 위해서 글을 쓰는 순간 오히려 글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내가 글을 쓰는 목적, 나아가 출간 작가가 되고자 하는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지속적인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이다. 의식만큼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없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모든 것을 한다. 바꿔 말해 인간은 의식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결국 의식과 세상은 동의어이다. 내 의식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세상이 커지는 것이었으니.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데 최고의 수단은 글쓰기이다. 글이라는 수단이 없는 한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정보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글은 곧 의식이자 세상이다. 나아가 출간 작가가 되어 나의 글을 출판하려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자기표현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갖 사회적 족쇄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돈이나 명성은 그저 덤으로 따라오는 수단일 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써 나갈 것이다. 내 브런치북이 정식으로 출간되든 안 되든 간에. 나에게 글은 세상을 향한 ‘창’이자 ‘방패’이며,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인간의 인식, 즉 세상은 ‘모’와 ‘순’의 오묘한 조화로 형성된다. 창과 방패는 서로의 의미를 필요로 하며, 양자는 서로의 대립적인 의미에 의지해서만 세상을 떠받칠 수 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통합적 존재이다. 현상만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분열적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아가 나는 나의 직장인 법원에서 피용자로서의 삶을 살기보다는 사용자로서의 삶을 살 생각이다. 사람은 고통스러워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고통은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디폴트 값(default value)이다. 그가 언어를 습득한 사람인 이상. 인생은 불공평하다고 하나, 고통에 있어서 만큼은 공평하다.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생기 없이 시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생기가 넘치는가? 사람은 인생에서 능동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때, 수동적인 인생을 살아갈 때 우울해지는 것이다. 하루 종일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기계의 부속품처럼 볼트와 너트를 조이면서 사는 삶이 행복할 리가 있겠는가? 사람은 능동적으로 살아갈 때, 자기의 인생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을 때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행복을 느낀다. 외견은 설령 똑같이 볼트와 너트를 조이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 살아가는 사람은 생기가 넘친다. 마치 소의 도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포정의 칼처럼.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법원 사용자이자 작가이다. 마인드 디자이너이자 심상 조각사, 인상 조각사, 세상 조각사이다. 나는 심리철학자이자 인생설계자이자 삶의 예술가이다. 나의 정체성은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다. 영역의 구분 없이 무경계의 영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노마드이자 세상의 온갖 저항을 역으로 활용하는 역용자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모두 무경계의 영토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중 오직 인간만이 억지로 경계를 설정하여 영토를 나누고 영역 싸움, 즉 언어전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다만, 인간이 언어를 배운 이상, 무인도에서 살아가지 않는 이상 무경계의 영토로 완전히 회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순간적으로 무경계의 영토에 발을 디디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따라서 우리는 차선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완벽히 무경계의 영토로 갈 수 없다면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언어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소모적인 언어전쟁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언어유희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편의에 의해 개발한 언어라는 도구에 의해 왜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도구로 인해 목적에 해당하는 우리가 다투어야만 하는가? 도구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만 한다. 목적이 도구를 위해 사용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역사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경험했지 않은가?


이제는 각성할 때도 되었다.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 우리가 우리의 편의상 만든 도구에 의해 설계된 그것을 이제는 능동적으로 사용할 때도 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피용자로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용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자. 세상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자기가 만들어낸 도구에 의해 자기가 사용되는 어리석음에 대해 누구나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 종류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부디 우리가 우리의 정신도구, 즉 언어의 사용에 의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세상에 도리어 우리가 사용되는 어리석음을 멈출 수 있기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만물의 졸장(졸렬하기 짝이 없는 우두머리)으로밖에 볼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사피엔스가 부디 본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만물의 영장(영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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