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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격 Nov 22. 2022

법원 내 골칫거리, 행정관의 존재

2022.11.22. 날씨 맑다

“입력은 해도 접수는 못하겠는데요? 제 일이 아니니까요.”


행정관의 말이다. ‘행정관’은 법원 직렬이 아니라 법원 내에서 일하는 행정 직렬의 공무원이다(지금은 불필요한 인력이라고 판단되어 없어진 직렬이어서 나이 든 여사님들이 많다).


전말은 이렇다.


내 옆자리에서 일하게 된 속기 직렬의 속기사님이 우리 법원의 협의이혼 접수실에 전입오자마자 기일을 포함하여 2주간 휴가를 쓰겠다고 선포한 것이다(그 사건 때문에 계장님도, 나도 당황하였고, 특히 행정 직렬 여사님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여사님들은 협의이혼 접수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할 뿐더러 일하는 공간도 완전히 다르고, 하시는 일도 별로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법원 내 직원 사정에 관심이 지대하시다). 결국 속기사님은 기어코 2주간 캐나다 여행을 떠나셨다. 접수대 두 자리 중 하나가 2주간 공석이 된 것이다(참고로 접수대에 앉아 있는 두 명 중 한 명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나머지 한 명인 내가 민원인들의 총알받이 역할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구조이며, 기일을 포함하여 휴가를 간다면 해당 재판기일에 일할 대체 인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부서로 전출을 간 전임자가 재판기일에 와서 대신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총무과에서는 나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없는 행정관 중 한 명의 긴급 투입을 결정하였다(하필이면 해당 행정관은 직원들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사람이어서 내가 눈여겨보던 사람이었다). 총무과에서는 말만 많고 일도 안 하면서 월급만 꼬박꼬박 받아가는 월급 루팡을 두고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무과의 필요에 의해(정확히 말하면 어느 특정 계장님의 언짢은 기분에 의해) 인력을 투입하면서 나를 위해 선심쓴다는 명분을 내걸고.


결국 내가 우려했던 사건이 터졌다. 입이 댓발 튀어나온 행정관은 협의이혼 접수실에 오자마자 만행에 가까운 발언을 날린 것이다. 여사님이 나에게 초면에 무례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깔려 있다.

1.놀고 먹으며 돈을 잘 받아가고 있었는데 최악의 자리를 2주간이나 감당해야 한다.

2.안 그래도 빌런으로 낙인 찍어 욕하고 있던 속기사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봐야 한다.

3.접수대에서는 민원응대업무를 해야하는데, 기세등등한 민원인들이 너무도 두렵다.

4.지금껏 법원 직원들을 뒤에서 품평하며 지적질해왔는데, 자기가 최전선에서 일했을 때 업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 같다.

5.총무과를 포함한 법원 직렬의 공무원들이 행정 직렬의 공무원들을 무시하기에 자기들에게 함부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6.협이이혼 담당자가 자기 업무를 맡았으면 온전히 자기가 책임져야지, 쓸데없이 지원을 요청해서 자기가 여기로 오게 되었다(물론 터무니 없는 오해였으며, 이러한 심리는 추후 나와의 대화 과정에서 발각되었다).


쌍욕이 나올 것 같은 상황(안 그래도 무능한 옆자리 직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심지어 기일을 포함시켜 휴가까지 가서 일을 키우고, 총무과에서는 원치 않은 인력을 내려보내서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X 같은 상황)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여 화를 가라앉힌 후 차분하게 여사님에게 말을 꺼냈다.


“아, 제가 지원을 요청한 적은 없는데요? 그러시다면 저랑 같이 총무과로 올라가시죠. 제가 사정을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총무과로 올라간 나와 여사님. 나는 여러 선량한 총무과 직원분들을 지나쳐 악명이 자자한 계장님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계장님 실례합니다. 지금 이 분께서 접수가 처음이어서 부담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접수를 못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그냥 안 내려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순간 당황한 계장님. 하지만 본인의 명성에 걸맞게 순식간에 태세전환에 성공하여 나에게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xx씨가 돌아가는 전체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인거 같은데, 그렇게 xx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왜? 이 분이 옆자리에 오는 게 불편해서 그래?”


분명 그 전에는 지금 이 명성 높은 계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길 나를 위해 지원을 보낸다는 명분을 내세우셨는데, 순식간에 태세전환에 성공하신 것이다(역시 악행도 해 본 사람이 할 수 있으며, 타고난 배짱과 뻔뻔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말을 꺼냈다.


나 : “그건 아니지만, 이 분이 접수를 너무 부담스러워 하셔서 그냥 제가 다 감당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계장님 : “xx씨가 입력까지 다 할거야? 그건 아니잖아? 입력이 안 되면 혹시 그 기간 동안 접수한 민원인이 전화올 때는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럼 이렇게 하자. 입력은 행정관님이 직접 본인 자리에서 하는걸로.”

나 : “아, 상황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계장님 :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xx씨가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어. 행정관님, 그럼 그렇게 하시죠?”


나는 이로써 내가 의도한 대부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빌런과 2주 동안 동행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인성이 훌륭하신(?) 여사님과 명성 높으신(?) 계장님을 소개시켜 드릴 수 있었으며, 나의 탁월한(?) 업무능력과 훌륭한(?) 인성에 대한 어필과 함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이이제의 전략을 활용함으로써 조직의 암세포 같은 인물들이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게 유도하였고, 모략인 듯 아닌 듯 모호한 행동을 함으로써 안개 전략으로 나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빌런들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죄책감과 꺼림칙함을 심어 줌과 동시에 나의 목을 칠 명분을 제거해버려 정치 공학을 시도할 싹을 잘라 버렸다. 이 정도로도 부족한 듯이 여겨져서 행정관들 사이에서 확성기 역할을 담당하는 분의 친한 동료에게 이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공개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매장당할 수 있도록. 이로써 나는 x 같지만 후련한 역설적인 기분으로 2주 동안의 강행군을 버틸 수 있었다. 어차피 여사님이 접수 업무에 제대로 대처를 못해서 일을 더욱 키우면 내가 혼자 감당하는 것보다 더 피곤한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나는 기꺼이 가시밭길을 택한 것이다(쉬운 길을 택하면 어려워지고, 어려운 길을 택하면 쉬워지는 것이 인생의 진리인 듯하다).


행정관은 대체로 법원 내 골칫거리이다(물론 모든 행정관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전반적인 문화를 말하고자 함이다). 책정된 업무도 별로 없는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법원 내 온갖 소문과 가십, 적폐의 온상이다. 할 일이 너무 없어서 그 시간 동안 직원들에 대한 탐구생활과 가십거리 찾기, 험담하기가 그들의 일상이다. 일이 많다면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입을 놀리기로는 판사의 머리 위에 있을지언정 은연중에 자기들의 인성과 능력과 그릇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격지심이 깔려 있다(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자기들보다 더 탁월한 직원들에게 가차 없는 비판을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공무원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박봉이며 공무원 연금도 국민 연금 수준(언론의 하급 공무원 털기가 수년간 지속된 결과이다)으로 낮아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이 인기가 많은 이유는 오직 신분의 안정성 하나뿐이다. 그 결과 나의 신분은 안정(?)되었을지언정 빌런의 신분 역시 안정(?)되어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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