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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격 Nov 23. 2022

가족관계실 계장님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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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3. 날씨 맑다


우리 법원의 가족관계실 계장님은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싸한 느낌과 함께 왠지 모를 찜찜함을 느끼곤 하였다. 아마도 계장님이 간간이 나에게 날렸던 사소한 발언들이 쌓여 그런 느낌을 형성했으리라(사소한 발언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곧잘 간과한다). 세계관의 크기가 비슷하여 시선이 겹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끼리는(쌍방 중 일방의 터무니없는 착각인 경우도 있다) 종종 탐색전을 빙자한 일종의 신경전이 벌어지곤 한다(사람은 순수한 관심이 아닌 계산된 탐색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지는 법이다). 가령 이렇다.

(농담 삼아 웃으면서) “어디, 신입이 감히”(물론 옛날에 했던 발언이다)

“은근히 약았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잘 알아본단 말이야?”(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살기 위해 업무에 대해 그나마 제대로 알려줄 만한 사람들한테 물어보러 다닌 것이 그렇게 비쳤던 모양이다)

(다른 직원에게) “xx씨는 딱 봐도 선해 보이잖아.”(… 뭔가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당시 같이 일하던 전임계장님께 순수한 호의로 커피를 사 드린 상황에서) “계장님에게 충성을 다하는구나?”

(내 옆자리에서 일하던 전임 속기사님이 협의이혼 접수실에 방문한 민원인의 요구사항이 가족관계실의 업무라고 판단하여 그를 가족관계실로 안내한 상황에서, 나에게 전화를 건 가족관계실 계장님의 짜증섞인 목소리) “xx씨, 자꾸(?) 그쪽 업무를 이쪽으로 내려보내지 마.”(정확한 발언은 생각이 나지 않으나 이런 취지의 발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고로 해당 사안은 가족관계실 업무가 맞았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지 않은 채 나에게 다짜고짜 따지 듯이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안내한 것도 아니다. 법원에서 실무관은 동네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후 내가 가족관계실 계장님께 전화하여 업무 분장과 관련된 정확한 정보와 전후사정을 설명드린 상황에서) “좋은 정보 땡큐~.” 뚝. (순간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중략)


그 외에도 내가 개인적으로 인성을 높이 평가해 어느 여직원(참고로 유부녀였다)에게 제법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를 이성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같다는 루머를 퍼트린 근원지도 그 계장님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다른 조직은 겪어보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법원의 분위기는 극히 보수적이다. 공무원 조직의 비생산적인 가십질에 일일이 신경쓰다보면 피가 마르고 할 수 있는 행동이 거의 없을 것 같아서 이제는 신경 끄기로 했다). 물론 의심의 물증은 없긴 하다.


사람들의 심리는 참 미묘하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세계관의 마법이라고나 할까.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세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신비스러운 작용을 하곤 한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물론 암중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가족관계실 계장님의 시선을 관찰해본다면 이러한 신비를 읽어낼 수 있다. 평범한 실무관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나의 실수나 동태에 대해서는 계속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까(아마도 나와 세계관의 크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은연중에 느끼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신비스러운 의식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내 입장에서는 다소 기가 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계관의 크기 외에도 인간의 신비스러운 본능의 작용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하나 더 있는 듯하다. 바로 인간관계 중에서도 이성관계다(용어의 정의 그대로 동성인간이 아닌 ‘이성인간’ 간 관계를 뜻한다). 소위 서로 ‘급’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성 간 관계에서는 설령 쌍방 또는 일방이 유부남 또는 유부녀라고 할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주시하는 미묘한 심리를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어쩌면 동성 간 관계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쌍방 중 누군가의 통찰력 결여로 인한 터무니없는 오해일 경우도 있다) 그 주시가 호의의 형태이든 견제의 형태이든 간에(호의에서 견제로 넘어가는 경우도 빈번하다. ‘존재급’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누군가의 오해로 인해 다른 일방이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을 때 보통 그런 일이 벌어진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대 가족관계실 계장님은 왕년에 남자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을 것 같다(그런 사람들은 티가 난다. 나이가 들어서도 왕년에 써먹던 스킬이 은연중에 남아있을 뿐더러 제법 반반한 얼굴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느 정도 남아 있게 마련이며, 이성에게 꽤나 대접 받았던 태가 남아 있어 이성에 대한 은근한 기대심리가 깔려 있다). 왕년에 잘 나갔던 남자들 또는 여자들이 그만큼의 성숙함을 키우지 못한 채 나이가 든다면 비참함이 발생한다. 점점 자기에게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지는 현상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매력포인트는 중력의 작용으로 인해 나이가 들수록 사라지는 구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승부수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하게 젊었을 때의 승부수를 계속해서 써먹으려는 서글픈 모습을 보인다. 쉽게 말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제법 괜찮은 이성이 알아서 호감을 표시해 주리라는 헛된 기대를 하는 것이다(이러한 행태는 놀랍게도 유부남 또는 유부녀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물론 제법 괜찮은 이성이 아닌 어정쩡한 자들에게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제법 인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그의 성장을 방해하는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뜨내기들의 선망 어린 시선으로 붕 뜬 기분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기에 고통을 감수하고 패러다임을 전환할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뜨내기가 아닌 제법 멀쩡한(?) 자들에게도 선망 어린 시선을 받고자 하는 기대심리로 발전된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단언컨대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함은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어떤 이득을 안겨주거나 나에게 그가 모종의 이유로 필요한 경우이다. 비교적 나이가 젊었을 때야 외모가 남에게 이익을 안겨다줄 수 있을지언정 어느 단계를 지나는 순간 그것은 남에게 매력포인트로 다가올 수 없다. 나이 든 사람이 남에게 매력을 줄 수 있으려면, 바꿔 말해 남에게 모종의 이익을 안겨줄 수 있으려면 인격과 품위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나이 든 사람의 승부수는 외모가 아니라 품격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비밀을 모른다면 사람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참고로 능력은 기본으로 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비단 가족관계실 계장님 뿐일까? 왕년시리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패러다임 전환에 성공한 소수만이 나이가 들어서도 인정받는다(원래 좋은 사람은 소수인 것이 정규분포상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우리가 품격을 갈고닦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에게 구걸하는 사람이 아닌 남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속세의 법칙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태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빈부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이유이다. 그것이 마음의 부이든 물질의 부이든 그 종류는 다를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위 사례를 통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가족관계실 계장님은 몸소 우리에게 실패의 표상이 되어주셨고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 주셨다(참고로 가족관계실 계장님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는 확실히 어떤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분이다. 그것이 생산적인 것인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어느 정도 존재급을 지니고 있는 자는 오히려 보통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자기관리에 힘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힘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종종 느끼곤 한다). 우리가 실패의 길이 어떤 것인지 직접 체험하기 전에 미리 그 사례를 몸소 보여주시는 세상의 수많은 가족관계실 계장님들에게 기꺼이 감사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시행착오를 생략하여야 한다. 인생의 화는 복이 되는 법이니 나는 이를 뼛속 깊이 새겨 나의 품위를 더욱 갈고닦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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