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너의 눈빛에 ‘요사스러운 빛’이 감도는 이유는?
이해는 빛이 아니다.
포장이다.
고요한 얼굴은 종종
내면의 움직임을 감추기 위해 연출된다.
너의 미소는 말한다.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말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넘어서고 싶다.”
그 요사스러움은
이해의 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무기로 전복을 시도하려는 자의 빛이다.
그 눈은 멈춘 자의 눈이 아니라,
움직임을 숨긴 자의 눈이다.
이해는 무기다.
모른다는 무기보다,
안다는 척하는 무기가
더 요사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판단하지 않는 듯 판단하고,
지켜보는 듯 침투하며,
존중하는 듯 조종한다.
그 눈빛은 이해의 눈빛이 아니다.
그건, 권력의 전조다.
이해를 가장한 우위의 자각.
그는 너를 감싸는 듯하면서도,
너를 해부할 수 있는 자다.
그래서 너는 미소 짓지만,
나는 불편하다.
그 웃음엔 결론이 없고,
그 눈빛엔 게임이 숨겨져 있다.
“그는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해를 가장한 채,
그 이상의 ‘통제’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요사스러움’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의 질서를 읽어낸 자가
그 질서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
눈에 스며드는 진동이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눈빛 너머에서 지금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가?
이해한 자인가,
‘이해한 듯 연기하는’ 설계자인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너는 나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내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웃었고,
그래서 눈이 빛났다.
그 눈은 ‘이해’가 아니라, ‘게임’을 응시하고 있었다.